[역경의 열매] 이건숙 (11) “여자도 많이 배워야”… 남다른 어머니의 교육열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62년 막냇동생 졸업식에서 어머니(오른쪽)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릴 적 내 집은 늘 책을 읽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서재는 마치 도서실 같았고 어머니는 공부방에 내 나이에 맞는 책들로 채워 주셨다. ‘피터 팬’을 읽고 며칠 밤을 자지 못하고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주인공을 기다렸던 유년의 숲이 그립다. 그림자를 두르르 말아 칼로 잘라먹는 마귀할멈 이야기는 얼마나 공포심을 안겨주었던지! 나이든 지금도 어둠이 내리면 그 비슷한 무서움이 불시에 엄습한다. 그 당시 방학 책은 우툴두툴 흑색지라 지우고 다시 쓰면 구멍이 뻥 뚫렸다. 어머니는 거기를 두세 번씩 다른 종이로 땜질해서 보충해 주셨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에 제출할 적엔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와서 창피했다.

시계 보는 법을 배울 적에는 얼른 이해를 못 한다고 어찌나 지청구를 들었는지! 따스한 볕에 쪼그리고 앉아 울타리 가장자리에 호롱불처럼 빨갛게 익은 꽈리 무리를 바라보면서 훌쩍였던 장면도 내 기억의 필름에 저장되어 있다. 어머니는 식사 준비를 할 적엔 부엌 한구석에 나를 앉히고 그날 신문 사설을 큰 목소리로 읽으라고 주문했다. 그 시절 사설은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 내게 한문과 문장력을 길러주려는 어머니의 숨겨진 속셈이었다.

오빠는 대학 재학 중 고등고시를 봤다. 1960년대 초반 국제법에 관한 책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일본어책을 구해 두툼한 대학노트 분량으로 번역해 아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직방으로 맞아떨어져 대학 재학 중인 아들을 판사로 만든 어머니의 치열함도 생생하다. 그 놀라운 공책이 S대학 도서관에서 많은 고시생의 손에 옮겨 다니다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없어졌다.

어머니는 자녀들 넷을 앉혀놓고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없이 너희를 키우는 일이 참으로 힘들다. 그러니 너희들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 공부만이 이 가정을 살릴 길이다.”

우리 네 자녀는 그래서 공부에 전력했다. 오빠는 경기고등학교 1학년 당시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에 응시해 대학시험을 바로 보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강경하게 말렸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건 허락 못 한다. 네 나이에 맞는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일생 중요하다.”

고등학교 시절 사귄 오빠의 친구들이 지금까지 서로 어울리는 걸 보면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현명한 분이셨다. 홀로 되어서 딸자식까지 학교에 보내느냐고 친척들의 입방아에 오를 적에 어머니는 내게 강하게 말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남자보다 더 많이 배워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단단히 기저를 닦아준 탓에 오빠와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했다. 6·25전쟁으로 우리 가정은 터진 웅덩이가 되었지만 나는 갇혀 살던 고인 물에서 흘러나와 냇물을 거치고 강을 따라 넓은 바다로 가서 세상을 배워가며 완전히 놀라운 변신을 했다. 친척들을 만나면 모두 이런 말을 했다.

“어머머! 인형처럼 앙증맞게 예뻤던 저 애가 지금 이렇게 컸어요. 튼실한 여장부가 되었네요.”

그렇다. 나는 전쟁 이후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뛰면서 키도 크고 건강하고 몸도 우람해졌기 때문이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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