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12) “그 학교 떨어진 건 기적… 하나님의 큰뜻 있는 듯”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5년 서울 정신여중 교정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엔 부서진 창고에서 가마니를 깔고 모두 양반다리를 하고 공부했다. 피난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1년 반을 월반하여 6학년이 되었다. 피난민들 틈에 끼어 학업을 중단하고 있다가 내 나이에 맞게 뛰어오른 셈이다. 구구단을 배우지 못하고 6학년에 들어갔으니 산수 시간은 곤혹 그 자체였다. 오빠는 내가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어찌나 머리에 알밤을 먹이는지 머리가 온통 부어올랐다. 3살 위의 오빠는 자신도 월반해서 힘든 판에 내가 가르쳐달라고 자꾸 매달리니 골이 아팠을 것이다.

6학년 담임은 60대 할아버지로 전쟁에 처한 한국의 현실에 어찌나 많이 우시는지 우리도 따라서 우는 날이 많았다. 그 당시의 추억을 살려 쓴 ‘스승의 눈물’이란 단편이 주간조선에 게재되어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6학년 후반기에는 일등을 할 정도로 공부가 제 궤도에 올라섰다. 위에서 의논 끝에 공부를 잘한다고 경기여중에 원서를 넣었다. 선생님은 “너는 경기여중에 꼭 붙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는데 발표에 보니 이름이 없었다.

선생님은 나를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 학교에 떨어진 건 기적에 속한다. 2차에서 제일 좋은 정신여중에 가거라.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는 모양이다.”

그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보니 크리스천이었던 모양이다. 그 뒤 나는 구박 덩어리가 되었다. 오빠의 들볶음이 어찌나 심한지 밥도 함께 먹는 걸 막아서 부엌에서 혼자 먹으면서 늘 울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 모든 학생이 한강 도강이 허락되지 않아 종합피난 중학교에 모여 남녀공학으로 공부했다. 중학교 1학년 모의고사에서 내가 전교 수석을 하고 돌아온 날, 오빠의 친구들이 몰려와 내 칭찬을 했다. 나는 방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네 동생 대단하다. 남녀를 통틀어 일등을 하다니!”

그러자 오빠는 지체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꼴이야. 그 애 경기여중도 떨어졌어.”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았다.’ 나는 이 말을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을 당시 남편의 입에서도 들었다. 어려서 혼자 교회를 찾아갔고 중학교를 믿음의 동산인 정신학교로 간 것은 예정돼 있었다. 주님의 줄에 내 가슴이 꽁꽁 묶여 끌려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한강 도강이 허락되어 서울 종로5가에 있는 정신여중에 들어가니 철저한 기독교 교육의 현장이었다.

매주 성경 시간이 있어 교목 선생님이 들어와 성경 과목을 가르치셨다. 이를 바탕으로 시험을 보고 학교 성적 제일 상단에 넣을 정도로 철저하게 성경 교육을 했다. 처음 성경 시간에 배운 것이 모세가 나일강에 버려진 사건이었다. 동화처럼 재미있었다. 주기도문을 쓰는 시험에서 나는 간략하게 요약해서 답안지를 써냈다가 교무실에 불려가서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그 뒤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줄줄 암송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나를 목사의 아내감으로, 또 소설가로 훈련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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