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13) 철저한 신앙훈련으로 10대의 나를 예비하신 주님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7년 서울 정신여고 교정에서 친구 손을 잡고 계단에 서 있다.


정신여중에 들어가서야 친구들 대부분이 장로나 목사 딸인 걸 알게 됐다. 부모가 교회에 나가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이 학교를 선택해 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나님은 10대 초반에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고 장차 쓸 인물로 훈련을 시키셨다. 그 당시에는 그걸 모르고 고등학교는 반드시 경기여고로 가서 오빠에게 보란 듯이 고개에 힘을 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정신여중·고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딸들이 모인 곳이라 다정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나는 중·고등학교 6년을 신앙으로 중무장했다. 봄가을에 열리는 사경회에는 모든 수업이 중단돼 온종일 강당에 모여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했다. 각 학년이 2학급이니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배웠다. 강당의 2층 입구에는 기도실도 있어 나도 거기 가끔 들어가 훌쩍이며 기도를 했다. 6년간 매주 배우는 성경 시간과 사경회,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전교생 예배는 십대의 나를 완전히 신앙교육으로 무장하고 다져지게 했다. 지금은 그렇게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하는 학교가 없다.

정신여중·고 시절에 나는 팔방미인의 훈련을 받았다. 신앙훈련에 겸하여 타인을 가르치는 교수법을 터득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김필례 교장 선생님이 나에게는 영어를, 김정자(나중에 서울치대를 나와 치과의사가 됨)에게는 수학을 동급생에게 가르치게 했다. 영어와 수학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급우들을 교실에 모아놓고 강단에 서서 가르치게 하고는 교장 선생님이 뒤에 가끔 들어와서 참관했다. 고인 웅덩이에 갇혔던 내가 터진 웅덩이 물을 따라 흘러가면서 강하게 훈련을 받은 현장이었다.

게다가 기막힌 행운은 친한 동급생이 근로 장학생으로 학교도서실을 관리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생쥐가 알밤이 담긴 방구리를 드나들듯 책을 빌려다 읽었다. 서가에 꽂힌 책을 빠짐없이 모조리 빌려다 보았을 정도였다. 교장 선생님이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하신 분이어서 전후 물자 부족의 시대였지만 다양한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

내 가정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걸 알고 담임 선생님은 나를 근로 장학생으로 판매부에 배치했다. 아침 수업시간 전과 점심시간 그리고 방과 후까지 아르바이트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장사하셨고 나는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자취를 했다. 오빠는 부잣집 상주가정교사로 들어가서 자취방에 머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동생의 밥을 해주고 판매부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 책들을 모조리 읽느라고 나는 친구들과 교제할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의 돈벌이가 시원찮아서 꼬박꼬박 식비를 대주지 못해 제때 음식을 해먹을 수가 없었다.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풍로에 숯불을 피워 음식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앞 개울에서 채소 장수들이 버리고 간 것들을 주워와 삶아서 소금을 쳐서 동생을 먹이기도 했다. 내가 그런 생활을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친구 덕분이다. 항상 내 곁에 있어 내가 굶으면 자신의 도시락을 아꼈다가 나를 먹이는 친구였다. 그녀는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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