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15) 슈바이처처럼 의료선교 꿈꾸다 “험난하게 여자가…”

소설가 이건숙(왼쪽 세 번째) 사모가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이던 1960년 서울 동도교회 교회학교 아이들과 소풍을 떠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의 제복 시절 꿈은 오직 하나였다. 의사가 되고 싶었다. 정신학교 근처에는 서울대학병원과 의과대학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날 적마다 하얀 가운을 입어 눈에 띄는 의사들과 학생들 모습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과로 가서 의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급우들은 거의 이화여대나 숙명여대 쪽으로 지원해 서울대, 특히 의대의 시험 과목과 완전히 달랐다. 이과에서 3명이 의대를 가려고 준비했다. 한 사람은 서울 치대에 들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의대로 가서 모두 의사가 되었으나 나만 홀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누가 무어라든 나의 목표는 서울의대였다. 그래서 필수과목인 독일어를 준비했다. 독일어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나름대로 독학을 해서 원문으로 ‘호반’이나 ‘황태자의 첫사랑’을 읽어냈다. 혼자서 서울의대 시험과목을 파고들면서 입시 준비를 했다. 의사가 되어 알베르트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한다는 꿈을 꾸었다. 돌이켜보니 그 꿈이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김점동을 실감 나게 다룬 소설 ‘예수 씨의 별’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내 꿈은 어머니와 오빠로 인해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주장은 아주 확연했다. “여자란 그런 직업을 가지면 인생길이 험난한 법이다. 여자란 애를 끼고 따뜻한 구들 위에 누워 뒹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아마도 두 분은 의대 학비 때문에 나를 밀쳐냈을 터이다. 오빠가 법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둘이 대학을 다니면 엄청난 학비 감당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서울사대에 가기로 했다. 국립대학에다 사범대학이니 등록금이 싸고 졸업하면 모두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니 취직이 하늘의 별 따기이던 시절 기막히게 좋은 조건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훌쩍이는 걸 보고 오빠가 고등고시에 붙으면 사범대에서 의대로 편입해 공부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영문과에 지원했는데 독문과가 신설되니 거기 갈 사람은 고쳐 쓰라고 해서 입시 당일 나는 독문과로 정했다. 다른 나라 소설보다 독일소설이 무척 매력이 있어서였다. 의대에 가려고 준비한 독일어가 이렇게 나의 대학 전공이 되어버렸다. 해서 나는 서울사대 독문과 제1회 졸업생이다. 얼마나 독문과가 치열했는지 서울법대 수준과 비슷했다는 후문이다. 전쟁 뒤끝이라 시골의 머리 좋은 학생들이 돈이 적게 드는 사대로 많이 몰렸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정말 재미없었다. 원서를 읽느라고 독일어사전을 끼고 살았다. 유학파 교수들이 가르쳤는데 내가 문학을 하고 보니 그 시절 배운 학문이 상당히 열악했다고 느낀다. 남녀공학이니 여자들 세계에서 자란 내가 남자들 틈에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앞에 뒤에 옆에 남학생들이 빼곡히 앉아서 교양과목 시간엔 어찌나 졸아대는지! 땀내는 진동하고 나는 저들의 조는 머리를 피해 몸을 앙당그려야 했다. 더 힘든 것은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에 눈을 뜬 그들은 예의도 없이 내 노트를 잡아채서 베끼느라고 야단이니 기가 막혔다. 집에 오면 언제나 녹초가 되어 파김치였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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