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16) 친구 따라 성가대 가입… 유치부서 찬송·율동 가르쳐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57년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인 정신여중고 동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신여고 시절엔 서울 미아리 천막 교회에 다녔고, 대학교 1학년부터 다닌 교회는 동도교회였다. 1959년 청량리는 그냥 시골이었다. 서울대 사범대학은 당시 용두동에 있었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단짝이 나를 그 교회로 데려갔다. 성가대가 그때 처음 조직돼 나도 친구를 따라 성가대에 섰다. 교인들은 가마니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고, 최훈 강도사님이 목회하고 있었다. 청량리 시장 곁에 있어 몹시 가난한 동네 교회였다.

나는 주일학교 유치부 교사를 했다. 좁은 교회에서 성탄절 준비 율동을 가르칠 곳이 없어 입구 얼음판에 10여명의 꼬마들을 모아 놓고 애들과 폴짝폴짝 뛰면서 찬송과 율동을 했다. 바로 옆에는 화장실이 있고 겨울바람이 거세서 아이들 코가 모두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성가대 가운도 없어 성탄절 성가를 부를 적에는 집에서 각자 흰 한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석탄 난로 냄새가 자욱하고 흰 한복은 얇아서 어찌나 추운지 오들오들 떨면서 성가를 불렀고 새벽송을 흰 한복을 속에 입고 돌았다. 성도들의 집 문 앞에서 성가를 부르면 주로 사탕과 과자를 주었고, 잘 사는 집은 우리를 집안으로 들여 떡국을 먹이기도 했다. 제일 튼실한 남자 대원이 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내미는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 한 자루가 되면 교회로 지고 와서 전 교인이 둘러앉아 잔치를 했다. 배고픈 시절 교회의 성탄절은 콩알도 나눠 먹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 당시 나와 함께 성가대에 앉았던 대학생으로 나중에 목사가 된 길자연이 있었다. 나중 내 남편이 된 신성종은 군대에서 제대해 연세대에 복학한 상태로 교육부 전도사로 함께 성가대에 섰다.

아버지 때문에 교회를 중단했던 어머니는 나를 따라 동도교회에 등록했다. 어머니가 교회에 나오게 된 사연은 기막힌 체험으로 두고두고 간증 거리였다. 주일에 나는 일찍 교회에 가려고 나가는데 어머님이 따라나섰다. 의아해 바라보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요 며칠 아주 이상한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져 창호지 문을 마구 적셔 구멍이 뻥뻥 뚫리는데 시커먼 양복을 입은 머리가 긴 남자가 내 목을 세차게 조여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버둥거리면서 고함을 치는데 밖에서 네가 우렁차게 찬송을 부르면서 문 쪽으로 다가오니 그 마귀가 슬그머니 손을 놓고 가버리더라. 연속 사흘을 두고 밤마다 똑같은 꿈이 반복돼서 너를 따라 교회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부름인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동도교회 초창기부터 다녀 권사 직분을 받았다. 최훈 동도교회 목사를 도와 많은 일을 해서 최 목사는 ‘나의 동역자, 김의순 권사님’이란 말을 많이 했다. 성경 암송을 어찌나 잘하셨는지 노년에는 우리 부부에게 암송대회 상으로 받은 석 돈짜리 금반지를 각각 끼워주기도 했다. 칠순 넘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적에 자식들만 기르다 왔다고 하나님께 보고서 내는 것이 부끄럽다고 신학교를 다니며 교회를 섬길 정도였다.

동도교회 최훈 목사님은 나를 보면 늘 이렇게 말했다. “딸이 어머니를 못 따라가. 어머니가 훨씬 똑똑하다니까.”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