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엄청난 사명’과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엄청난 사명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로선 도저히 실천 불가능하다고 할 명령입니다.
요즘도 선교사 한 사람을 어떤 나라로 보내려면 얼마나 많은 훈련과 지원을 해야 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엄청난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약속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엄청난 사명과 놀라운 약속 중 어느 것이 더 클까요.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명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 복음화의 사명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사명보다 약속이 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 성경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했고, 신학교나 선교센터도 없었기에 이단과 무서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현지에 교회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교비를 보내줄 파송교회도 없어 스스로 일하며 생활해야 했고 강도의 위험, 바다의 위험, 광야와 강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복음은 전해졌고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갔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들과 항상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사명보다 놀라운 약속이 더 컸던 것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를 파송할 때 많은 준비를 합니다. 선교사 훈련 과정은 20세기 들어 비약적 발전을 했습니다. 신학교마다 선교학 과정이 만들어졌고 많은 선교단체가 세워졌고 현지 정보도 풍성하고 재정 후원 체계도 구축하고 안전 대책도 세우고 선교사 노후에 대한 준비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교사 한 사람을 세우고 파송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에 힘쓰는 이유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교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약속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설교나 강의 정도로 끝냅니다. 선교 훈련에서도 영성훈련 과정 이수, 경건 훈련 한두 과목 수강으로 해결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은 선교사 본인이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선교 완성이 요원해 보이는 것입니다. 선교 현장의 풍성한 열매가 없고 선교사들도 무기력해지고 선교 헌신자도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우리 안에 임하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과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는 것은 엄청나고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 중에 독특한 것입니다. 불자는 부처와 한 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교 신자도 공자가 자신 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이슬람교도도 무함마드와 연합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연합했다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문제는 이 놀라운 약속을 교리적 지식으로만 여기지 실제로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국교회 교인들의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교회에 모일 수 없고, 교인이 서로 만날 수 없으니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자는 예수 동행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놀라운 약속이 실제 이뤄지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선교만 아니라 어떤 사명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 동행 일기를 쓰는 것은 그 방법의 하나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기 힘쓰자는 것입니다.
(선한목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