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17) 사윗감 반대하던 어머니 “귀가 커 장수는 하겠네”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5년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신성종 목사와 약혼식 도중 인사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충남 논산여고에 배치돼 부임했다. 1963년도엔 취직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서울사대에서 학비를 싸게 받고 공부를 시킨 대신 배치된 학교에서 3년을 근무하는 것이 의무였다. 논산여고는 연무대가 가까워서 훈련병들이 많았다. 군인들의 도시이기에 여학교는 학생들 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방과 후엔 선생님들이 조를 짜서 논산극장과 시내를 순찰하며 학생들을 감시했다.

여학생들은 어찌나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지, 논산극장에 들어가보면 어머니의 허름한 한복을 빌려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온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짐과 동시에 서로 아는 체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통에 모두 잡혀서 다음 날엔 교실 밖 복도에서 수업을 듣는 벌을 받았다. 내가 맡았던 반의 절반 이상이 영화관에서 적발돼 교장 선생님은 담임인 내게 심하게 굴었다.

당시 개봉한 ‘폭풍의 언덕’이 명작이므로 꼭 봐야 한다는 내 주장에 전교생 단체관람을 시켰는데, 그 내용을 두고 교장이 한바탕 난리를 친 뒤끝이라 더 심했다. 영화에서 총각이 유부녀를 사랑하는 내용이라고 성화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처음 강단에 섰을 때 나와 가르친 학생들과의 나이 차는 서너 살 정도였다. 이젠 나와 함께 백발 할머니가 된 제자들인데 지금도 나를 찾아와서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즐긴다. 거기서 3년 연속으로 담임교사로 근무한 뒤 대전여고로 전근을 가게 됐다.

그 기간 토요일엔 서울로 올라갔다. 주일엔 동도교회에 나가 맡은 일을 계속했다. 신성종 전도사는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남학생들 틈에서 대학 생활을 한 내 눈에는 결혼 상대가 아니었다. 키도 작아 보였다. 어머니도 그걸 알고 엄청나게 반대를 했다. 어머니는 직접 신 전도사를 앉혀 놓고 조건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더구나 신학을 한다니 “내 딸은 사모 감이 아니다, 그냥 내 딸하고 교회에서 함께 일하니 교제는 해도 더 이상을 허락 안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내가 충남에 내려가 있는 동안 그는 매일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교로 편지가 오니 동료 교사들도 눈치를 챌 정도였다. 신 전도사는 매일 새벽기도가 끝나면 어머니 뒤를 따라 우리 집에 가서 어머니 앞에서 신앙 얘기를 나누며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이런 신 전도사를 앞에 두고 어머니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가정이 어려워도 키라도 좀 크면 얼마나 좋아. 그 몸에 깡패가 덤비면 여자를 보호할 수 있겠어.”

오빠나 동생들이 장신이라 나도 작은 키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신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그래도 귀가 크니 장수하겠군. 그거 하나 마음에 드네.”

6·25전쟁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일찍 혼자가 된 어머니는 딸만큼은 그런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 모양이다.

아무튼 동도교회 성가대에서는 길자연과 신성종 두 커플이 나오게 된 곳이다. 지금도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인이었던 길자연 목사의 사모님이 눈에 선하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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