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18) 유학 떠나게 된 신 전도사, 약혼부터 하자고 막무가내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7년 서울 충현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행진하고 있다.


어머니는 신성종 전도사의 가정을 파악하기 위해 집배원을 따라 어렵게 달동네에 사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셨다. 결혼은 절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가난한 가정을 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즈음 신 전도사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왕복 비행기 삯과 2년간 모든 학비와 식비를 받고 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러자 약혼을 하고 떠나겠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딱 두 사람이라고 기억된다. 시험에 붙고 신 전도사는 어머니께 “가난한 나의 집안과 관계없이 미국으로 가서 살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다짐했단다. 목사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거절하는 내게는 “목사는 안 하고 박사가 되어 교수가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주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바느질도 못 하고 음식도 못 한다고 걱정하는 어머니 앞에서 신 전도사는 “바느질은 침모를 시키고, 집안일은 식모를 두고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농담을 주고받은 모양이다.

약혼식을 앞두고 오빠의 반대는 기가 막혔다. 식이 끝나고 오빠는 밖에 나가 눈물을 닦고 있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어머니를 원망했다. 오빠의 주장이 아주 거셌다. “너 정도면 내 친구 중 은행원이나 의사나 판검사를 소개해도 되는데, 그 사람은 아니다. 너 그 집에 시집가서 어쩌려고 그러느냐. 고생문이 훤하다.” 남동생들도 신 전도사가 들어오면 머리를 돌리면서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반대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법조계에 있어 정치와 연결돼 전쟁 통에 돌아가셨으므로 신학을 하는 남자는 장수하고 하나님을 모셨으니 가정이 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딸이었다.

대전여고로 전근한 나는 미국 유학시험을 패스하고 신 전도사가 있는 대학 근처의 대학원 교육과에 입학 허락을 받아 곧 미국으로 떠날 수속을 밟고 있었다. 대전여고는 충남에서는 알려진 명문 학교이고, 대전고 남학생들이 대입준비 독일어를 단체로 내게 와서 배우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대전여고 교장이 ‘어떻게 신혼에 떨어져 사느냐’면서 서울 중앙여고로 전근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황신애 중앙여고 교장은 독일어 시간만으로는 채용이 안 되니 영어와 함께 맡을 수 있는지 물었다. 면접에서 노벨상 수상 작가 펄 S 벅의 소설 ‘대지’를 펴놓고 질문을 했다. 또박또박 다 읽고 번역을 했더니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는 조건으로 임용했다. 대전여고 교장의 강한 추천에 힘입어 명문 공립학교에서 서울의 사립학교로 전근이 된 셈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시아버님이 막내 시누이를 데려와 하나뿐인 신혼 방에 넣으면서 공부를 시키라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3년을 쉰 시누이는 검정고시를 치르기 위해 학원에 보내고 남편은 신학교에 다녔다. 얼떨결에 나는 두 명의 학생을 거느린 학부모가 되었다. 미국에서 2년 공부하고 온 남편은 충현교회에서 나와 함께 주일학교 고등부 교사로 1년 있다가 신학교 졸업반에야 간신히 고등부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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