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20) 산욕열로 죽을 고비 넘긴 후 유학간 남편 따라 도미

소설가 이건숙 사모의 아들을 돌봐주신 친정어머니가 1969년 서울 정릉의 아파트 앞에서 손자를 안고 있다.


시어머니는 17세에 남편 신성종 전도사를 낳았지만, 나는 서른이 가까운 노산이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기저귀도 빨고 찬물에 목욕도 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져 누워있는 나를 보고 장모에게 전화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오빠는 어쩔 수 없이 친정어머니를 내게 보내면서 투덜댔다.

“이러다가 내 동생 죽이겠다. 어쩔 수 없지. 어머니가 가서 돌볼 수밖에 없네요.”

급히 간 병원의 진단은 산욕열이었다. 옛날에는 거의가 이 병으로 산모가 죽었으나 페니실린이 나오고는 생존율이 높다고 했다. 나는 치료를 받으면서 아이는 친정어머니가 돌봐서 한 달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 당시 고2 담임을 했는데 모두 8학급에 여자 담임은 나 혼자였다. 학생들 인기투표에서 내가 제일 표를 많이 받아서 손목시계를 상으로 탔고 학교의 인정을 받아 가장 힘든 자리에 배치됐다. 영문법과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대입으로 고2부터 학생들은 초비상이라, 나는 정릉에서 별을 보고 나와서 별을 보고 귀가했다. 다행히 친정어머니가 아기를 기르면서 살림을 도맡아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결혼 후 죽음의 첫 고비를 넘긴 나는 이런 고비를 앞으로 수없이 넘어야 한다는 걸 형광등처럼 그때는 짐작도 못 했다.

남편은 충현교회 고등부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다가 다시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학장이 비행기 표를 보내오자 박사 학위를 따겠다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시절에는 한국은행에서 딱 100달러만 유학생에게 바꿔주는데 그 돈도 없어 70달러를 환전했다. 남편은 김포 비행장에서 아기와 나를 두고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1년 뒤 나는 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갔다. 갓 돌을 지난 아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남편은 혼자 오라고 주장했다. 가보니 내가 돈을 벌어야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방도 못 얻고 친구의 거실 바닥에서 잠을 자는 남편은 학교에 다니면서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다 그랬다. 밤에 학교 건물을 청소하거나 아니면 야간 공장의 막노동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1960년대 한국은 너무 가난했고 미국도 부자는 아니었다.

다행히 학교 인근 성공회 교회의 사찰로 취직이 돼서 우리 부부는 교회 교육관의 방 한 칸 사택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집세를 내지 않았고 초라하지만 부엌과 거실도 있어 좋았다. 한 달에 수고비로 주는 100달러로는 한 주에 25달러씩 식비를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남편의 학비와 책값, 기타 비용이었다. 자동차도 고물로 샀는데 보험은 들지 못했다. 미국 생활에서 자동차는 두 다리와 같아 차가 없으면 꼼짝 못 하니 그건 필수품이었다.

직업을 구해야 했다. 학비가 없으면 남편의 공부는 중단이다. 낮에는 남편이 학교 간 사이 나 혼자 교회의 사찰 일을 했다. 성공회는 미국의 상류층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라 정원도 아름답고 예배당도 환상적이다. 그들은 날마다 모여 놀았고 나는 그들이 모일 적마다 지시에 따라 의자와 책상 배치를 하고 청소도 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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