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21) 군용 가방공장 취직… 시각장애인 틈에서 재봉틀과 씨름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출석 교회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두 아들을 안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와있던 유학생 부인 셋이서 직장을 구하러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도시락으로 감자를 삶아 핸드백에 넣고 셋이서 무조건 직장 구하기 작전에 뭉쳤다. 1960년대 한국은 너무 가난했다. 얼마 안 되는 유학생과 그 아내들은 모두 막노동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침 집을 나설 적에 남편 신성종 목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무조건 ‘예스, 아이 캔’(Yes, I can)이라고 대답해. 그래야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채용하는 곳이 미국이니 이거 꼭 기억하라고.”

셋이서 처음 도착한 곳이 고급 양복을 만드는 곳이었다. 내가 제일 용감해 그들이 묻는 말에 남편이 일러준 대로 ‘예스, 아이 캔’을 씩씩하게 말했다. 해서 내게 맡겨진 일은 남자 양복의 어깨를 잘라가면서 박는 고난도의 일이었다. 한국에서 친정어머니는 내가 수를 놓거나 재봉틀 앞에 앉는 걸 금했다. 공부만 잘하라고 다그쳐서 교사 생활을 할 때까지 손수 내 옷을 지어서 입힌 분이다. 자신은 그렇게 하면서 딸인 나에게는 공부만 하라고 했으니 이 일이 큰 위기로 다가왔다. 더구나 여긴 전기 재봉틀이라 무릎으로 탁탁 치면 드르륵드르륵 속도가 엄청 빨랐다. 나는 다 지어놓은 남자 양복 어깨를 뭉텅 잘라내면서 망쳐버렸다. 주인은 머리를 흔들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세 사람 중에 재봉 일에 달인인 나이 많은 사모님은 쉬운 박음질을 시켜서 그분만 합격했다. 그러자 그 사모님은 겁에 질려 우리를 따라 나왔다. 영어도 못 하는데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일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큰길가 벤치에 앉아 핸드백 속 감자로 요기를 하고 다시 큰길을 따라 걷다가 허름하게 보이는 ‘워킹 블라인드’(Working Blind)란 건물의 구인광고를 보고 들어갔다. 여기는 시각 장애인들만 일하는 곳으로 주정부에서 군인들이 메는 가방을 만드는 곳이었다. 시각 장애인들이 손으로 더듬어 다 하는데 눈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정교한 재봉 일을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 모두 취직이 됐다. 군인들의 가방은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마지막 마무리로 정교하게 박음질을 하는 일이라 고난도 기술이 필요했다. 나는 양복점의 경험을 살려 재봉틀 고치는 기술자에게 살살 물어가면서 재봉틀 돌리는 법과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묻고 배워 드디어 터득하게 됐다. 우리 셋만 앞이 보이니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기차를 타고 다운타운에 나와 공장 일을 하는데 나는 그때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날 오빠는 ‘넌 미국에서 네 남편 공부시킬 돈을 벌려고 막노동하러 가는 것’이라고 핀잔을 주었는데 그 말이 너무 맞아떨어져서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이곳은 ‘피스 워크’라는 제도를 두고 있어 일하는 대로 피스 당 돈을 더 주었다. 일한 양만큼 돈을 주니까 속도를 내서 많이 만들면 돈을 더 많이 주었다. 그 욕심에 빠져서 우리 셋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전기 재봉틀을 돌려가며 무거운 군인 가방과 씨름을 했다. 그렇게 공부시킨 남편들이 성공해 귀국했고 훗날 신학교 총장이 된 분도 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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