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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다음 주는 고난주간이다. 교회는 고난주간에 십자가와 예수님의 고난에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다. 과거 교회학교 수련회 같은 데에선 마지막 날 밤 휙휙거리는 채찍질 소리와 예수님의 신음이 뒤섞여 나오는 테이프를 틀어 놓고 울음바다를 만들어 놓는 일도 있었다. 2004년 개봉했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는 예수님의 고난을 극대화해 묘사했다.

특히 그 정점에 해당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후에 린치를 당하는 장면이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무차별 폭행하고, 예수님의 등가죽은 피범벅이 된다. 영화는 철저한 고증에 의해 예수님의 수난을 극사실화한 것이라고 홍보했지만, 사실 성경의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사복음서 중 어느 한 곳도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찬찬히 읽어본다면 그 담담하고 절제된 필체에 놀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 수난의 어떤 점에 주목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치와 모욕이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향해 물리적 폭력보다는 정신적이며 언어적인 폭력 행사에 더 집중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죄목에 맞추어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갈대를 들리며 가시관을 씌워 마치 왕처럼 꾸민다. 그러고 나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소서!’라고 외치며 마치 가이사에게 경례하듯 했다.

조롱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고 손찌검을 한다. 누군가에게 침을 뱉는 것은 최대한의 모욕을 안기는 일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엄청난 모멸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이들에게 다뤄지며 놀림감이 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런 모욕에 맞대응하지 않으신다. 아무 힘이 없으셔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당장에라도 12군단도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에 즉각 반응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모든 무리를 단숨에 제압해 버리실 수 있는 권능의 주님이셨다.

과연 사람의 온갖 수치와 모욕을 견딜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않고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댈 수 있는 비폭력적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이 모든 수치를 말없이 감내하실 수 있었는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부끄러움을 주고자 했으나 예수님께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이 땅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추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수치가 아닌 하늘에서의 영광을 바라보셨다.

신학교에서 들었던 고 박윤선 교수님의 말씀이 여전히 귀에 생생하다.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부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다가 문 닫는 교회가 없다는 현실이라고 하셨다. 하늘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기꺼이 이 땅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기로 작정한 교회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 예수님처럼 부끄러움을 감내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 땅에서 누릴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저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다시금 우리가 진정 부끄러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시간이 되길 소원한다.

(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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