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와 월나라가 장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강 상류에 있던 초나라는 물길을 따라 내려와 전쟁을 치렀다.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퇴각할 때는 사정이 달랐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월나라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묘수를 찾던 초나라는 유명한 기술자인 공수반을 모셨고, 공수반은 초나라를 위해 중요한 도구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잡아당기는 갈고리 구(鉤)였고, 다른 하나는 밀어내는 기구인 거(拒)였다. 적이 탄 병선이 후퇴하려고 하면 ‘구’로 잡아당기고, 전진해 오면 ‘거’로 밀어냈다. 초나라는 이 기구들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공수반은 자기의 발명품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때 마침 그의 동향 사람인 묵자가 초나라에 왔다. 공수반은 자기 업적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묵자는 자기가 만든 ‘구’와 ‘거’는 공수반이 만든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며 이렇게 말한다.
“형님,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만든 ‘구·거’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만든 ‘구’이고 공손함으로 만든 ‘거’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의 갈고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친해질 수가 없고, 마침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되려면 서로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위안커가 쓴 ‘중국신화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묵자의 ‘구거’는 상생의 도구였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잡아당기는 갈고리 ‘구’와 밀어내는 ‘거’를 가지고 산다. 무력한 이들을 잡아당겨 해치거나 지향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경계선 밖으로 밀어낸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평화의 도성으로 불리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떠올린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경외심과 더불어 겸손함이다. 경외심을 잃는 순간 그들이 대표하는 종교는 이익 수단으로 전락한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사는 유대교 사회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중심은 신앙을 빙자한 이해관계였다. 대중은 그 강고한 연대의 가면을 벗길 힘이 없었다. 그들은 이익과 권한은 자기들 쪽으로 잡아당겼고, 자기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이들은 불온분자 혹은 이단자의 누명을 씌워 밀어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거룩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세상을 가르던 유대교 사회적 세계가 더럽다 하여 도외시하던 이들을 혼신의 힘으로 맞아들였다. 예수는 자기 외부가 없는 분이었다. 예수는 또한 사람들을 추종자로 만들지 않았다. 소수의 제자와 동행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어떤 형태로든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 각자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중심에 접속한 주체가 되기를 바라셨을 뿐이다. 제자의 도리는 스승의 한계 안에 언제까지나 머무는 것이 아니다. 스승의 뜻을 계승하고 그 뜻을 살려내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던 예수님의 길을 걷고 있는가. 사랑으로 잡아당겨야 하는 이들은 밀어내고, 한사코 거부해야 할 특권과 이익은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지는 않은가. 시인 박두진 선생은 ‘갈보리의 노래2’에서 “꽝 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 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파도같이 밀려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묻는다. 예수는 지금도 척박한 현실 속에서 갈보리 언덕을 오르고 있다. 입 맞추어 배반하는 이들조차 포기하지 않는 사랑 때문에. 승리에의 욕망을 내려놓았기에 그는 기꺼이 자신을 세상을 위한 선물로 내줄 수 있었다. 가슴 벅찬 부활의 노래를 부르기 전, 십자가의 길 위에 서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청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