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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이야기는 이야기를 부르고



사람들이 사는 곳 어디에서나 이야기가 빚어진다.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합류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낳는다.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간다. 이야기 전체의 시종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각자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와 성격을 날실과 씨실로 삼아 다양한 삶의 무늬를 만든다. 그 무늬가 모인 것이 문화이다. 세상에 무의미한 이야기는 없다.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보여도 개인의 삶은 저마다 각별하다.

젊은 날에는 삶의 보편적 진실에 더 끌렸다면 지금은 개별적 삶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이 감내하거나 극복해야 했던 신산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가슴이 저릿해 온다. 가인의 후예인 우리는 에덴의 동쪽, 놋 땅 주민으로 살아간다. 안식 없는 삶을 견디며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 누구나 잘살고 싶어하지만 ‘잘’이라는 부사에 담기는 의미는 제가끔 다르다. 흔히 사람들은 ‘잘 산다’는 말을 물질적 풍요나 바라는 바를 유보 없이 이룰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이들도 있다. 산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고 어떤 상황의 요구에 응답함을 통해 성숙해진다. 신앙생활이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이웃이 되라는 요구에 응답하는 과정이다. 이웃들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떠나야 한다.

몇 주째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이들과 만나고 있다. 언어도 문화도 피부색도 다른 이들 속에 섞여 살면서 겪은 애환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기가 막힌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교회는 그곳에 이식된 고향이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고 새로운 비전을 품었다. 비스듬히 기댄 채 세찬 바람을 함께 견디며 새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숲의 나무들처럼 그들은 그렇게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버지니아 지역 목회자 모임에서 86세 되신 원로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시종일관 모임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면서, 젊은 목회자들과 똑같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강의를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국을 떠나온 지 60여년, 그는 한동안 유일한 한국인 목사로서 미국 회중을 섬겼다. 한국과의 모든 연결이 사라진 지역에서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 때문일까. 그는 어려움을 겪는 젊은 목회자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있었고, 적절한 조언으로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냐는 젊은 목사의 질문에 그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교회는 죄인들이 있어야 해요. 죄인이 없는 교회는 없어요. 그들이 들어와 치유되고 새로워질 수 있어야 해요.” 불화를 일으키는 교인들을 처리해야 할 문젯거리로 보기 쉽지만 그들을 사랑과 관용의 마음으로 대할 때 전환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뜻이라 짐작한다.

뉴저지 어느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친교의 시간을 가질 때, 한 분이 다가와 눈물을 글썽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한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소명을 느껴 미국으로 건너와 신학을 공부한 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품는 일에 헌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이들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꽤 많은 이들이 그런 노력을 목회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번번이 좌절을 맛보다가 이번 집회를 통해 자기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노라고 했다. 예수님도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타박을 들었다.

점잖음은 때로 진실한 신앙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 삶의 이야기가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 이야기에 연결되어 공감과 이해, 환대와 수용, 경탄과 기쁨이 스며들 때 서름한 삶이 푼푼해지지 않을까.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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