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태후 (8) 대학 졸업 후 교육 선교사로 첫발… 마을 교회 예배 회복

송태후 장로가 1975년 전남 완도군 군외면 영풍리교회에서 교회학교를 열고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당시 군외동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송 장로는 폐허가 된 예배당을 수리하고 학교 아이들을 전도했다.


1973년 2월 목포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는 대학을 졸업하는 우리를 직장 선교사로 파송했다. 당시 지도 간사였던 고(故) 채남선 목사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 길에 오른 바울과 바나바처럼 직장에서 어떤 고난에도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며 하나님 나라 사역자로 일할 것”을 권면했다.

그해 5월 나는 교사로 발령받아 전남 완도군 금일면 생영초등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하나님이 내게 붙여준 이 아이들을 나의 분신처럼 주님의 가슴으로 품게 하소서’. 이것은 교육자로서 내 평생 기도다. 기도한 대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복음으로 관계하며 하나님 나라 영역 안으로 끌어들였다.

첫 부임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바다가 생업의 터전이어서 ‘바다 신’을 섬기는 신당을 마을 뒷산에 세우고 정초면 풍요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72년 교회를 개척하러 오신 한 여전도사가 ‘이 신당을 깨뜨려야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며 산에 올라가 신당을 훼손해 버렸다.

내가 부임을 했을 때는 이 일로 인해 그 여전도사는 마을에서 쫓겨나 산에 움막을 짓고 혼자 예배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정직하게 구했다.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을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전도사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전도사가 마을에 내려와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요청도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을 사람들과 화해하고 그해 10월부터 전도사는 다시 마을로 내려와 교회 사역을 재개했다. 나 또한 전도사를 도와 교회학교를 시작하며 예배를 회복해갔다.

모 교회와 여러 교회의 지원을 받아 74년 99㎡(30평) 규모의 사택을 겸한 예배당을 건축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이 교회가 바로 생영교회로 지금까지도 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75년 완도군 군외동초등학교에서 근무했을 때였다. 10여년 전 세워진 현지 교회는 문이 닫혔고 훼손됐으며, 주민들의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다. 성경 속 느헤미야가 훼파된 조국 성전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예배당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주민들에게 짐을 치울 것을 간청했고 흩어진 성도들을 모아 폐허가 된 예배당을 수리하고 단장했다.

나는 학교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학교를 시작했다. 흩어졌던 성도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재개했다. 자비량 전도사로서 사역한 것이다. 주중에는 학교 교사로 교육 현장에 충실했으며 주말과 주일에는 축호전도와 예배에 집중했다. 3개월이 지나자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이 20여명에 이르게 돼 교역자를 초빙했다. 나는 봉사자로 섬겼다.

교사에게 주어진 황금 시간인 방학이 되면 영적 재충전을 위한 수련회나 금식기도를 통해 소진됐던 영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했다. 그 힘으로 교육 현장에 맡겨진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20대의 젊음을 주님의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길 수 있도록 능력 주심에 감사드린다. 비록 미숙했지만 말이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