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나그네와 고아를 찾아서



소수자로 통칭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아무리 반복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오히려 권장하고 독려하고 강제해야 한다. 인간의 인정과 도리고, 하나님의 요청이고, 예수의 지적 사항이었다. 이성에 반하는 사회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인류는 시대별 약자 등 소외계층의 지위를 위해 분투하고 전진하며 제자리를 찾아왔다. 바야흐로 약자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다수자와 동등한 위치이고 모자람이 아니라 다름으로 설명되는 인권의 평등은 국제 상식이 된 지 오래다. 만약 이를 거스르면 인류 보편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고 동시대 구성원으로부터 몰지각한 인격자로 격하된다. 작금의 사회적 동의와 여론의 향방이 이러함에도, 여전히 나는 우리 사회에 억울한 약자의 군집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나그네와 고아다.

경남 함양의 상림공원을 갔을 때다. 마침 휴일이었다. 인산인해의 공원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 모두가 즐기는 곳이었다. 거기서 이국적 마스크의 건장한 외국인 근로자 일행을 만났다. 반가웠다. 마을에서는 저들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외국인 며느리는 더더욱 보기 어렵다. 분명히 있는데 일상생활에서는 만나볼 수가 없다.

다들 어찌 살고들 있나? 필리핀에 있는 코피노(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또 어떤가? 생의 출발부터 위축된 아이들은 성장하는 내내 태생적 돌림을 당하고 있지 않겠나? 코피노뿐이겠나? 여전히 보육원에 맡겨지는 아가들도, 베이비박스에 담겨지는 신생아들도 있다. 뿐만 아니다. 연일 뉴스에 등장하는 성폭력 피해자 대부분은 어린이다. 소아성애자에게 가스라이팅으로 폭력적으로 당하는 어린이들도 증가하고 있다. 아바타 세상에서도 성범죄가 성행한단다. 사각지대에서 여전히 어린이는 약자이다. 성의 포식자들에게.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외국인은 나그네다. 코피노는 거기서도 여기서도 나그네고 고아다. 메타버스 세상에서 아이들은 보호자 없는 고아다. 이민청이 생기나 보다. 난 대찬성이다. 혹자들이 예견하듯 인구 절벽을 대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공존하는 저들에게 법의 보호와 법의 의무를 안내하고 관리하는 인간 대접이 있기를 바라서다. 이참에 바라는 바 진정 약자인 어린이들을 지켜주고 애정 어린 관심으로 저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까지 지속적으로 전담할 전문기관이 신설되면 좋겠다.

장학제도는 여전히 능력 있는 학생을 금전적으로 지원할 뿐 그의 인간됨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학원도 학교도 좀처럼 대학 입학 목표를 변경하기 어렵지 않겠나. 가정 간 부익부 빈익빈도 문제지만, 막 자녀교육을 시작한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자녀교육의 한계가 점점 더 심각해 보인다. 심지어 부모 자신의 경력이나 게임을 위해 자녀들의 성숙·성장을 방임한 이들이 벌써 여러 번 노출됐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래전 노동자들이 그랬듯이 장애인들도 편차는 있겠지만 이미 약자가 아니다. 소리를 내고 쟁의를 하고 다툼을 만들고 결과를 만들어 가는 동력이 있다. 그래서 소수자이지만 약자라고 하기에는 힘이 있고 힘도 모인다. 아마 점점 더 그 힘은 강화되리라 본다. 그러나 외국인 이민자들과 근로자들은 자청반 타청반 그림자 세계에 산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보호자 없는 아이들도.

더 늦기 전에 그 일을 교회가 했으면 좋겠다. 이 시대 우리 주변의 약자 중심 교회들이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모으고 실행에 옮겼으면 좋겠다. 찾아 나서고 저들을 위한 일을 도모하고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복음적 행동을 팬데믹 시대에 더 성숙해진 우리 성도들이 시작했으면 한다.

정애주 홍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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