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바뀐 지 두 달이다. 반응이 흥미롭다.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한숨부터 쉬며 ‘벌써’가 아닌 ‘겨우’를 외친다. 겨우 두 달인데 피로감은 흔한 말로 ‘말년 병장’급이다. 사라진 것이 비단 청와대만은 아닌 듯하다. 아예 정부가 보이지 않는다. 무정부 상태의 국가 체험기 같다. ‘검사 나으리’들만 신이 나 자신들의 공간인 검찰 내 조사실로 국민을 통째로 불러들여 강제체험을 시키는 그림인데, 아무도 겁을 먹지 않는다. 오히려 어설픈 설정에 ‘풉’을 날린다. 눈에 힘을 주고 예의 압수수색영장을 수백 장 남발해도 반응은 시큰둥하다. 어떤 카드를 써도 먹통이 된다. 스펙이 높을수록 반지성이 빛나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쓴웃음을 짓게 하는 블랙 코미디의 정석이다. 이것이 ‘유령 정부’의 진정한 위기가 아닐까 싶다.
스펙이 높을수록 왜 반지성이 빛을 발하는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입에 ‘스펙’이라는 단어를 물고 다녔다. IMF 외환위기 이후가 아닐까 싶다. 세계 금융계의 큰손들이 민주화 시대의 가치 자산은 물론이고, 자수성가형 영웅들을 비웃으며 산업화시대의 성공 신화까지 산산조각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실과 노력을 한 방에 날려버린 사건!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온 국민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다며 스펙 쌓기 경쟁에 나서게 된 것이. 지금 그 결과를 확인하고 있는 듯하다. 피 터지는 경쟁만 있고 경쟁력은 없다. 스펙 사회가 남긴 씁쓸한 자화상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화려한 스펙으로 치장된 위험 수위의 열패감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이들의 메마른 절망뿐이다. 그 틈을 번지수 잃은 증오의 언어들이 채워가고 있다. 증오는 세상을 제압할 수 있다는 오만의 다른 얼굴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진짜 위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누구나 매 순간 새로운 시간 앞에 선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누구도 선생일 수 없다. 그저 모두가 배움이 더 필요한 학생일 뿐이다. 배움의 길에 들어선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을 단숨에 제압하겠다는 거친 오만이 아니라 ‘큰 사람’이 되고자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겸손한 용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채울수록 고갈되는 ‘열심’이 아니다. 스스로 고갈시켜버린 ‘학생심’이다. 타인의 보잘것없는 경험조차 내게 큰 배움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모든 일을 증오로 망치는 어리석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을 무너뜨려야 내가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공격만이 살길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도 학생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은 약육강식이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정글이 아니다. 남을 살려야 나도 살 수 있는 21세기다. 내가 무너지지 않으면서 남을 망가뜨릴 수 있는 길은 없다.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누는 순간 이미 나는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우아한 욕망에 속지 말아야 한다. 비열한 욕망만이 경계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는 실패의 시간에서 배워야 한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미화할 생각은 없다. 다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제대로’ 한 실패는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은 실패의 시간이 쓸모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의 고뇌는 어제의 성적표이기도 하지만 내일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고뇌하는 오늘이 값진 이유다. 교회마저 무지의 칼을 휘두른 사나운 시대에 사랑의 사도로 짧은 생을 살다간 이용도 목사의 한마디가 그립다. “나는 남을 가르칠 자가 아니요 배울 자이니, 일생 학생심을 가지고 배워 마땅한 자입니다.”
하희정(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