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에 걸쳐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동서 문화가 다르듯이 그릇 비유 혹은 ‘그릇론’도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과연 동서양은 그릇론을 통해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고, 그런 차이는 어떤 의의를 지닐까?
동양의 그릇론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문자적 의미는 ‘큰 그릇은 더디 만들어진다’이다. 즉 큰 그릇은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 따라서 큰 그릇이 되려면 연륜이 쌓일 정도의 장기 수련을 각오해야 한다. 둘째, 확장된 의미는 ‘큰 그릇은 더디 만들어지지만, 늦게라도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큰 그릇이 되기 위해 바친 수고가 헛수고만은 아니다.
대기만성의 원뜻이야 어찌 됐건 이 말이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 사회가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기에 지도자가 필요하고, 그 지도자가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큰 그릇은 뜻이 전화돼 ‘너그러운 인물’이란 의미를 지닌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너그럽다’는 “넓어 감싸 받아들이는 성질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큰 그릇은 보통 아량(雅量)이나 도량(度量) 같은 단어와 함께 사용된다. 그런데 아량과 도량은 단순히 물리적인 양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그런 용도의 단어는 당량, 용량, 함량, 중량, 내용량, 역량 등 따로 있다. 마지막에 언급된 역량(力量)은 기량(伎倆)이나 능력(能力)이란 의미도 있어, 역량 있는 지도자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역량 있는 지도자라고 해서 다 아량이나 도량이 있는 지도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외면만 바라보다가 기대가 꺾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동양 그릇론의 핵심은 ‘너그러운 그릇’이다.
서양의 그릇론은 서양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기독교를 통해 설명해보자. 기독교는 ‘깨끗한 그릇’을 중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그릇론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묘사하기에 ‘그릇론’을 넘어 ‘토기장이론’에 이른다. 즉 그릇은 그릇 만든 사람, 곧 하나님을 전제한다.
성경의 그릇론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첫째, 그릇은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피조물이다. 곧 인간은 피조성(被造性)의 존재다. 둘째, 그릇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신의 뜻 안에서의 자기 위상이 중요하다. 신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상을 받거나 심판을 받는다. 셋째, 그릇은 피조물의 대표적 특성인 연약성(軟弱性)의 존재다. 이런 연약성은 역으로 그의 피조성을 상기시킨다. 넷째, 그릇은 신과의 관계와 이에 기초한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거룩함(聖性), 즉 ‘깨끗함’으로 출발한다. 그릇의 기원은 신에게 있지만 그릇의 실생활의 시작은 깨끗함에 있다. 성경에는 이런 맥락에서 ‘토기장이의 그릇’(피조물), ‘나의 그릇’(신의 뜻), ‘질그릇’이나 ‘더 연약한 그릇’(연약함),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거룩함) 등의 표현이 나온다. 결국 서양 그릇론의 핵심은 ‘깨끗한 그릇’이다.
요즘 한국 사회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시끄럽다. 저마다 큰 그릇이 되겠다는데 막상 그런 인물이 드물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사람 됨됨이부터 문제다. 심지어 큰 그릇될 기회가 주어져도 기회를 잡지 못하거나, 기회를 잡더라도 실망만 안기고 있다. 인간 본성상 큰 그릇 되고 싶은 마음이야 어쩔 수 없어도, 행여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적어도 큰 그릇의 의미부터 되새기는 것이 염치 있는 일이다. 그래야 한국 사회가 평온한 사회,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너그러운 그릇’ ‘깨끗한 그릇’의 교훈은 오늘도 귀 기울일 만하다.
안교성(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