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선과 악을 분별하기 힘든 시대에 살았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세상의 기준은 ‘내 편’과 ‘네 편’이 있을 뿐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신앙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오래전 미국 교회를 탐방하며 인디애나주에 있는 해먼드침례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교회 안에 들어가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단을 둘러싸고 있는 방탄유리 때문이었다. 그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잭 하일스 목사는 죄에 대한 설교를 자주 했는데, 회중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설교자를 향해 총을 쏘았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에 대해 명백하게 ‘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말을 수긍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 근거해 보면 이유는 이렇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죄가 큰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죄에 대해 민감한 이유는 대개 ‘죄’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싫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도 이런 죄의 심각성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교회는 본질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고, 가장 명확하고 선명하게 복음을 설명할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를 통해 같은 민족이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그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틀림을 드러내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려고 애쓸 뿐이다. 흔히 말하는 ‘네거티브 전략’은 상대방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자신의 단점을 덮으려는 시도들이다. 서로 옳음을 주장하면 세상이 더 좋아져야 하는데, 서로를 긴장한 눈빛으로 노려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차별적 언어에 대해 아주 민감해졌다. ‘젠더 이슈’라 불리는 것인데 여성을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발언에 대해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기 쉽다.
또 장애인에 대한 표현도 아주 조심해야 할 부분이 됐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단어의 반대말을 이야기해 보세요.” ‘장애인’이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정상인’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목사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장애인의 반대는 ‘비장애인’, 청각장애의 반대는 ‘건청인’, 그리고 시각장애의 반대는 ‘정안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른다고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이런 언어들을 통해 건강한 의식과 사회와 약자를 바라보는 교정된 시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더 돌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단순히 언어만 바꾸고 조심한다고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시작하는 기독교의 명백한 진리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는다.
네 편이나 내 편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지 보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면 내 생각을 교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결국 교회가 세상에서 또 하나의 ‘네 편’으로 전락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보지 못함은 아닐까.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세상에, 그것이 올바른 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 신앙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닐까.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