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이상한 변호사가 만난 고래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은 이름의 TV 속 변호사가 사람들 마음을 흔들고 있다. 신생 채널에서 방송되지만 9회 만에 15%를 넘긴 시청률도 이례적인데, 어딜 가나 우영우 얘기인 걸 보면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우영우 앓이’ 중이다. 개인화, 파편화가 점점 더 심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이만큼 애정을 갖고 다 같이 이야기하는 콘텐츠는 정말 드물어졌다. 그래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만든 현상은 그 자체로 ‘이상’하다.

이미 워낙 많은 비평과 칼럼에서 우영우를 다뤘지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어 한마디 거든다. 드라마의 이런저런 부족함을 지적하기보다는 무엇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헤아리는 데 집중해보자. 인기 있는 대중문화 상품은 당대의 사회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영우의 ‘이상함’에 주목한다. 영우가 이상하게 여겨지는 건 자폐 때문이 아니다. 여느 변호사와는 다른 비범한, 별난, 엉뚱한 생각이 그 설명으로 더 적절하다. 그는 변호사지만 높은 수임료, 고위층 클라이언트, 법을 이용한 사익은 안중에도 없다. 그가 편드는 이들은 노인 여성, 성소수자, 중증 자폐인, 촌농, 탈북인, 대규모 토목공사로 해체될 마을 주민, 학원에 지친 어린이들이다. 재판에 지더라도 사람이 우선이고, 대세가 아닌 소수를 향한다. 로펌 대표 말마따나 정치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이런 영우가 우리한테 이상한 이유는 다음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돈 앞에서 사람의 마음처럼 나약한 건 없어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범상함’이다. 하지만 영우는 다르다. 드라마는 영우가 기발한 발상을 해내는 순간을 고래를 통해 익살맞게 표현한다. 환해진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고래를 떠올리는 ‘고래 모멘트’다. 그런데 컴퓨터그래픽(CG)으로 그려낸 고래가 유유히 헤엄치는 곳은 바다가 아니라 빌딩 숲이다. 바닷속에서나 통할 상식과 철학을 도심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영우를 상징하는 듯하다.

나는 이 드라마가 우리 시대에 대안적 가치를 갖는 게, 지켜내는 게, 그렇게 살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류를 거스르고 대세를 거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영우 캐릭터를 ‘천재’와 ‘자폐 스펙트럼’의 결합으로 설정한 건 그런 존재가 얼마나 예외적인지에 대한 표상으로 읽힌다. 영우는 어릴 적부터 왕따와 차별, 외로움을 겪어야 했다. 세상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고래를 만나 바닷속 상식을 체득한 배경이다. 그렇다고 자기 바다에만 갇혀 있던 건 아니다. 친구 그라미와 동료 수연,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덕에 빌딩 숲에서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착한 드라마’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자칫 식상할 법한 이야기에 정작 대중이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비결은 따로 있다. 우영우는 완벽한 히어로가 아니다. 무한한 힘을 소유한 절대선의 집행자가 아니란 말이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실수와 실패 앞에 자주 무너지는 초짜 변호사다. “저는 의뢰인에게 도움이 되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자기 한계 때문에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고, 법을 이용해 부당 이익을 취한 자를 조력한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한다. 진리와 도덕을 독점하지도 않는다. 이런 주인공이기에 사람들은 더 공감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

드라마가 만들어낸 현상을 통해 우영우의 ‘이상함’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란 걸 확인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살아가는 개인과 공동체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경계인으로서 다른 가치를 붙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신앙 공동체라면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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