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1) 내 삶의 지침 된 어머니의 훈육과 기독교 신앙

박희천 목사가 책을 읽는 모습. 그는 31일 “지금도 고저(그저) 매일 일어나 하루 종일 성경을 읽습네다”라고 했다. 국제제자훈련원 제공


나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간혹 후배 목사들이 나를 찾아와 감사하다. 살아온 긴 세월을 돌아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1927년 평양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평남 대동 김제면 외제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면 소재지마다 교회가 한두 군데씩은 있었다. 어머니는 5남 1녀 중 막내였던 나를 각별히 사랑했다. 어머니는 가족 중 유일하게 나를 교회에 데려다 줬다.

어머니는 “교회에 가면 좋은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 교회는 시골 동네 교회치고는 제법 컸다. 여섯 살부터 교회에서 배운 노래와 그 노래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름과 얼굴까지 생생히 떠오른다. 평양에 있던 숭실대 학생 선생님들이다. 대학생들은 방학에 우리 교회에 와서 두 달간 머물렀다. 3년 동안 그렇게 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농촌에 간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집이 셌다. 어릴 때 누나가 나를 업으려고 했다. 나는 그게 몹시 싫었던 모양이다. 업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팔이 부러진 적이 있다. 젓가락처럼 굵은 동침을 맞는 데도 울지 않아 어른들이 나를 “독한 녀석”이라고 했다.

내게 기독교 신앙의 첫 씨앗을 나누어준 김제교회를 평생 잊을 수 없다. 김제교회는 작은 시골 교회였지만 평양에서 온 대학생들이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김제교회는 해방 후에는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가 부임했다. 성경을 많이 알던 그는 성경을 열심히 가르쳤다. 내가 아홉 살 때 우리 집은 평남 순천 사인면 사인리로 이사했다.

사인리는 학교가 가까웠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이사를 결정했다. 외제리는 소학교가 없었다. 형들은 3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다. 소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쓰고 읽었다. 여학생 숫자는 적었다. 한 반에 남자가 다섯 줄이면 여자는 한 줄에 불과했다. 이사를 가자마자 사인장교회에 나갔다. 장년이 100여명, 어린이는 40여명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도덕적으로 엄격한 분이었다. 나는 교회에서도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훈육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설날이 되면 친구들과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던 시절이다. 세배하면 어른들은 대개 1전을 주었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형편을 빤히 알아서 세뱃돈을 많이 주는 집을 찾아다니곤 했다. 어릴 때 집 밖에서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나눴다.

“○○네 집에 가서 세배하면 돈을 많이 주고 ○○이 집에 가면 적게 준다.” 그 얘기를 들은 어머니가 나를 집 안으로 부르셨다. “세배는 돈 받으러 가는 게 아니다. 새해를 맞아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는 일이다.” 어머니의 눈빛은 엄했고 어조는 단호했다. 어머니는 평소 내게 “남잡이가 제잡이”란 말을 자주 했다. ‘네가 남을 해롭게 한다면 그것이 너를 해롭게 할 것’이란 뜻이다. 이 말씀은 내 삶의 지침이 됐다.

약력=1927년 평남 대동 출생, 평양신학교·숭실대·고신대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Th.M.)·칼빈신학교 수학, 내수동교회 담임,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