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2)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진학… 학교 첫 시험서 2등

박희천 목사가 1962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차진실 사모, 세 자녀와 함께했다. 박 목사는 차 사모와 동향이다.


1941년 나는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땐 문과나 이과, 상고나 농고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일반인들은 그냥 통칭해 상급학교란 의미로 ‘웃학교’라고 불렀다. 소학교 졸업 후 중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면 소재지 전체에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다. 여학생은 한 명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진학률이 낮았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면 중등학교에 못 간 아이들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차이나 카라로 된 검정색 교복만 입으면 저절로 우쭐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업학교에 간 것은 순전히 어머니 의지 덕분이었다. 마침 형님이 철도국에 다녔고 집에서 평양을 오가서 기차 승차권을 마련해주었다. 내가 살던 사인면에서 다섯 번째 역이 평양이었다. 70리 길인데 기차로 1시간 정도 걸렸다. 당시 서울 평양 부산 인구는 각각 35만명, 25만명, 23만명이었다.

평양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차에서 내려서 20분을 걸으면 상업학교에 도착했다. 평양이 사인면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지만 그렇다고 굉장히 크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상업학교 한 학년은 두 반씩 100명이었고 5학년까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주산과 부기를 배웠다. 상업학교 첫 시험에서 2등을 했다. 시골에서 온 내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다들 놀라워했다.

그다음 시험 때는 더 열심히 해서 1등을 했다. 상업학교에서 열린 주산대회에서 출전해 1등을 하기도 했다. “네가 1등을 하다니 장하다!” 어머니는 내가 좋은 성적을 낼 때 매우 기뻐하셨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는 게 어머니에게는 낙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하루 통학 시간 2시간 내내 기차에서 공부했다. 친구들이 잡담하고 장난치더라도 나는 오로지 공부에 집중했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없었다. 호적에 이름을 올려야 할 때 아버지 이름을 따 대충 지었을 정도다. 하지만 어머니는 매우 지혜롭고 올바른 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바르게 자라도록 교회에 보냈고 공부뿐만 아니라 사람됨을 강조했다. “양심껏 살아라.”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 중 하나다. 어머니는 솜씨도 뛰어나 가족들이 입는 옷을 직접 만드셨다.

상업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는 매일 도시락을 싸주셨다. 언제나 조와 팥이 섞인 밥에 반찬은 고추장 하나였다. 쌀밥은 명절이나 아플 때만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상업학교 시절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일본인 교장 때문이었다. 미국을 극도로 싫어했던 그는 “원수의 말을 뭐하러 배우냐”며 3학년부터는 아예 교과에서 영어를 뺐다.

그 교장은 평양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를 향해 “그 나라에서 제일 못난 사람들이 선교사로 온다”고 험담을 하기도 했다. 일제 말, 정세가 복잡해졌다. 중등학교는 5년제였으나 비상조치법에 따라 우리는 4년 만인 45년 3월 졸업했다. 나는 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가난했다. 나는 동네에 있는 사인금융조합에 취직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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