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8) “죽든 살든 데리고 가자”… 국군 전세 밀려 대구로 피란

1951년 대구 대영의원 주변. 박희천 목사는 영락교회에서 만난 고향 소년 2명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한다.


영락교회에서 사흘간 지내다 고향 사인장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 해방 직후 이남해 서울 중구 필동에 집을 마련해 잘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 지내며 피난길의 피곤을 풀었다. 매일 영락교회로 가 건물에 잔뜩 붙어 있는 벽보를 읽었다. 하차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 주일학교를 다닌 학생 2명이 부모형제를 찾는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내게 그 아이들까지 돌볼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아이들을 모른 체하면 서울까지 무사히 오게 해주신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 것 같지 않았다. 두 아이는 17세, 사촌지간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피난 오다가 폭격을 맞아 다 흩어졌다고 했다. 한 아이는 지뢰를 밟아 크게 다친 상태였다. 배가 갈라져 창자가 밖으로 조금 나와 있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가여운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죽든 살든 내가 데리고 가야겠다.’ 국군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서울에서도 피난을 가야 할 상황이 왔다. 가마니와 이불을 둘둘 말았다. 화물열차 지붕에 올라탄 채 대구까지 왔다. 대구역에서 두 아이와 셋이 가마니를 깔고 잤다. 겨울인 데다 바람이 세서 추웠지만 셋이 의지하고 견뎠다. 나를 하늘같이 믿고 따라다니는 녀석들을 보면서 큰 책임감을 느꼈다.

어느 곳이든 교회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구 남산교회에서 고향 사인장에서 온 사람 여섯을 만났다. 그곳에서 고향 선배이자 금용조합에서 같이 일했던 신복윤 형을 다시 만났다. 형의 도움으로 미군 육군병원에서 노무자로 일하게 됐다. 내가 맡은 일은 화장실 청소였다. 나는 청소 후 화장실에서 내내 성경을 읽었다. 그 이상 좋은 독서실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있다가 환자용 화장실 청소도 맡게 됐다. 환자용 화장실은 건물 안에 있으니 난방이 돼 성경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생활비는 쌀값 밖에 안 들었다. 반찬은 소금이면 족했다. 예전에는 쓰고 짰던 소금이 피난 다니며 먹으니 고소하기 그지 없었다. 함께 지낸 두 아이의 자립을 위해 뭘 할지 궁리했다. 당시 대구에는 엿이 많았다. 1000원에 열다섯 가락이었다. 두 아이에게 각각 목에 걸 수 있는 엿판을 만들어주고 엿 한 가락에 100원씩 받으라고 일렀다. 열다섯 가락을 팔면 500원이 남았다. “사람들 만나면 피난 오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아가 됐다고 해. 그럼 불쌍히 여겨 엿을 사줄 거야.” 아이들은 엿을 곧잘 팔았다. 어느 날 한 녀석이 명함을 받아왔다.

대구 서부교회 박명훈 목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 목사는 불쌍하다며 아이들에게 1000원을 주고 엿은 받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서부교회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전도사로 채용됐다. 교회로 가면서 아이들과는 헤어지게 됐다. 떠나는 날 셋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주일 유년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설교했다. 그런데 풍금이 없어서 찬송가를 가르치기 어려웠다. 개척 교회 형편에 풍금을 살 여유는 없었다. 풍금을 놓고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