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은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역삼역?”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주인공의 자기소개다. 로스쿨을 수석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서도 만점 가까운 점수를 얻어도,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이유로 갈 곳이 없다. 반년의 백수 생활 끝에 겨우 한 로펌에 취직했지만, 그를 향한 동료들의 첫 시선은 곱지 않다. 하지만 우영우는 특유의 기억력과 통찰, 세상을 보는 선한 눈을 가지고 여러 복잡한 사건을 해결해낸다.

우영우처럼 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글귀를 회문(回文)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말장난이나 문학적 장치 등으로 사용되던 회문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에 비장애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편견을 폭로하는 짜릿함도 안겨주고 있다. 이 드라마는 뒤집어 읽어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자폐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온 장애가 거꾸로 장애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며, 회차를 거듭할수록 시청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말에는 여러 회문이 있다. 앞으로 읽고 뒤로 읽고 할 때 발생하는 어감의 재미와 달리, 어떤 회문은 세계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 예가 ‘부익부’와 ‘빈익빈’이다. 인간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어떤 정치인 종교인 사상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똑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부익부와 빈익빈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류가 벗어나지 못하는 불공정과 불평등의 고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깊이 연관된 회문이 있다면, 그것은 ‘일요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금요일 오후 십자가에서 죽은 한 사람이 일요일 새벽에 죽음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죽음이 다스리던 현실에 새로운 생명이 들어왔다. 경쟁과 폭력과 거짓으로 유지되던 옛 세계가 심판받고, 평화와 화해와 진리로 정의되는 세계의 빛이 역사에 비쳤다. 1세기 어느 일요일에 벌어진 이 도발적인 사건을 기념하고자 예부터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을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란 의미의 ‘주일’이라고 불렀다.

일요일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일요일이다. 마치 부익부 빈익빈 같은 안 변하는 현실을 묘사하는 회문처럼, 우리는 이전 것을 똑같이 답습하고 고착화하며 일요일을 보낼 수도 있다. 이 경우 ‘일주일’ 동안 살아온 일상의 모습이든, 아니면 ‘일요일’마다 형식적으로 지키는 종교 예식이든 상관없이 그날은 기존 것의 연장 혹은 반복으로 그친다. 이는 토요일과 월요일 사이에 있는 일요일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주일’이 아니다.

반면 ‘우영우’가 세상의 편견을 뒤엎는 것처럼, 일요일은 현 사회에 알게 모르게 새겨진 차별과 폭력을 뒤엎는 특별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아무리 절박한 정치적 경제적 어젠다가 있을지라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바가 있다고 해도,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불변하는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일요일에 되새김질 함으로써 말이다. 성경의 언어를 빌리자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은 현실의 질서와 논리에 갇히지 않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라는 주님의 부름을 마음에 새기는 날이다.

포스트코로나 상황이라서만이 아니라, 교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예배 회복’이라는 구호가 있었다. 하지만 예배 자체는 회복의 대상이 아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이 불러오는 새롭고 도발적인 생명이 예배를 통해 늘 새롭게 회복되어야 할 바이다. 이 과업이 얼마나 잘 수행되느냐에 따라, 예배는 우리가 기존 질서를 단순히 맴돌게 할 수도 있고, 편견의 시선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게 할 수도 있다.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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