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14) 매년 교인 가정 모두 심방… 성경 구절 맞춤 처방도

박희천 목사 부부(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가 2009년 내수동교회 출신 목회자 부부들과 야유회를 갔다.


교회마다 부흥의 비결은 다르다. 다른 교회에서 시행한 것이 우리 교회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많은 교회 부흥 비결을 탐구해보았지만 우리 교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역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수동교회는 충실한 말씀 준비, 결석자 점검, 전 교인 전도대회를 통해 교인이 늘었다.

나는 매년 교인 전체의 집을 방문하는 대심방을 실시했다. 대심방을 하면서 각 가정을 방문할 때 빈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백지상태로 방에 앉아 사람들과 3~4분 대화를 나누면서 집 상황을 파악했다. 의사가 왕진 갈 때와 똑같다. 진찰하기 전에는 확실한 병명을 모른다. 가정을 진단한 뒤 ‘뇌리 성경 일람표’에서 각 가정에 맞는 성경 구절을 처방했다.

당시 화종부(현 남서울교회) 목사가 나와 함께 심방을 하다가 내가 그 집안에 딱 맞는 성경 말씀을 찾아서 전하는 걸 보고 교회로 돌아가 부교역자들에게 말했다. “오늘 박 목사님이 말씀 주시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요. 당번을 짜서라도 박 목사님을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내수동교회에 부임한 첫 주일부터 주일 설교 내용을 요약해 주보에 실었다. 다음 주 설교 본문과 제목도 예고했다. 주보 요약 설교는 나중에 찾아볼 수 있어 좋았다. 교인들은 주보를 전도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설교를 담은 우리 교회 주보는 이래저래 인기가 많았다. 1975년 부임할 때 내수동교회 교인은 140여명이었는데 얼마 안 가 매주 1000부 이상의 주보가 다른 교회로 나갔다.

주보를 우편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이 점점 늘어났다. 주보를 보내 달라는 곳이 많아 주보 발송을 전담하는 사무원 한 명을 따로 채용했다. 한국교회를 위해 이 정도 봉사는 감당하자는 생각이었다. 설교 테이프도 함께 보내 달라는 요청이 많아 아예 그때부터 카세트테이프에 설교를 녹음해 함께 우송했다.

내수동교회는 대학부가 유명했다. 내가 부임했을 때 오정현(현 사랑의교회 목사) 학생이 대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 대학부 학생은 서너명에 불과했다. 그는 누가 따로 맡긴 것도 아닌데 열심히 전도했고 78년 대학부 여름수양회 참가자는 80명이 됐다. 우리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회 중 교인이 가장 많은 충현교회도 대학부 학생이 50~60명이던 시절이었다.

79년 “네가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자로 일하라”며 오정현 학생을 대학부 전임 전도사로 임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다. 그러다 나의 강권에 “정 저에게 직책을 주시려면 전도사 말고 간사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는 81년까지 3년간 대학부 책임자로 일하다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때 대학부 학생 수는 150명이었다. 당시 내수동교회 전체 교인이 450명이었는데 3분이 1이 대학생이었다.

내수동교회에서 전도사를 지낸 목사들 중에는 큰 교회를 담임하는 이들이 많다. 오정현 화종부 목사를 비롯해 김남준(열린교회) 송태근(삼일교회) 오정호(대전 새로남교회) 박성규(부산 부전교회) 이관현(대구 내일교회) 목사 등이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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