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국창 (3) 강인함과 인간미로 몸소 인생의 멘토 돼 준 부모님

강국창 장로 아버지인 강수원 명예집사와 어머니 박선규 명예집사의 생전 모습. 두 분이 자녀들에게 보여 준 본은 가정의 평화였고, 남겨 준 가훈은 ‘서로 사랑하라’였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이끌어 준 스승을 꼽으라면 부모님이 ‘0순위’일 것이다. 열 장정 부럽지 않았던 어머니의 억척스러움과 강인함, 그리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성실함으로 열한 식구의 가정을 지키고 인간미를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부성애는 내 인생 곳곳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에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다. 태백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발발해 피란길에 올랐을 때였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이던 형님이 학도병으로 징집돼 끌려간 터라 아버지는 걱정이 되셨는지 서둘러 피란길에 오르셨다. 경북 영주쯤 도착해 여장을 푸는데, 미군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미군들이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것을 나눠 준다기에 아이들을 따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울면서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국창아, 야 이놈아!”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리더니 나를 팍 안았다. 아버지였다.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기억도 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의 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으려는데, 윗주머니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뭐지? 혹시 이거 월급봉투 아닌가, 한번 볼까?’ 호기심에 봉투를 슬쩍 꺼냈다. 예상대로 월급봉투였는데, 누런 봉투에 수기로 뭔가 잔뜩 적혀 있고 붉은 도장이 촘촘히 찍혀 있었다. 몇백몇십 원까지 꼼꼼히 적힌 글씨를 보니 한눈에 봐도 월급 가불 표시였다. 12월 월급은 1월 월급을 가불해 가져가고, 다음 달 월급을 받으면 채워 넣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부모님을 모실 기회가 많아지면서 어머니와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누던 중, 그때 일이 생각나 여쭤본 적이 있었다. “너거 아부지 고생 많이 하셨다. 그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서 니들 공부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얼마나 고생을 하셨냐. 니들 아버지 월급봉투는 온통 빨갛더라.” 그 말씀에 우리 모두 숙연해졌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멘토를 찾아다니는 이때,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식을 키워온 부모부터 먼저 돌아보는 수고로움이 선행되었으면 좋겠다.

탄광촌의 삶은 잔잔한 시냇물 같았다. 동네 사람 생활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비슷했다. 초중고등학교는 각 한 곳씩뿐이었고, 고등학교조차 졸업 뒤 탄광 취업으로 이어지는 공업고등학교였다. 공고에 입학해 광부가 되는 삶, 이것이 불문율 같았다.

“아버지, 저 광업소에 취직했습니다.”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귀향한 큰 형님마저 광부의 길을 걷기로 했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까지 이 길을 가야 하나. 아니야, 다른 길이 있을 거야. 대학에 가자, 서울로 가는 거다.’

마음을 굳게 먹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래 좋다. 너 공부 잘하고 똑똑한 거 잘 안다. 대학가라. 등록금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면 안 되겠냐. 대신 니 아래로 줄줄이 동생들이 있으니까 재수는 절대 안 된다.” 결심은 했지만 앞길은 막막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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