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국창 (4) 서울 명문대 합격 소식에 현수막 내걸고 동네잔치

연세대 재학 시절, 언더우드 동상 앞에 선 필자. 대학 시절은 신나게 놀면서 많은 사람을 경험했던 시기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말로 ‘후시마’라고 하는 벽장 속에 틀어박혀 책을 파고 또 팠다. 고향 친구들은 놀기 바빴다. 남녀공학이었던 터라 함께 모여 어울리는 남녀 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조금만 어울려 놀아볼까’ 하는 생각이 피어오를 때마다 머리를 흔들며 뒤돌아서곤 했다.

책과 씨름한 끝에 고3 입시를 치렀다. 지금도 합격자 발표일이 기억난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상경해 청량리역에 내렸다. 신촌으로 가기 전, 급한 마음에 조간신문을 샀다. 당시에는 신문에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실망했던지 신촌에서 자취하던 형님과 약속도 잊은 채 태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라 형님댁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형님이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었다. “너 합격했더구나.” 형님이 내민 신문을 보니 붉은색 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내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내 이름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축 합격! 강국창,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합격!’ 마을 어귀에 현수막도 걸렸다. 합격 소식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다. 지금껏 한 번도 일류 대학에 학생을 진학시킨 적이 없던 모교로서도 일대 사건이었다. 지역 기업의 후원을 받는 첫 번째 수혜자로도 선정되었다.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였다.

서울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서울은 차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은 도시였다. “어이, 강원도!” 태백 출신인 나를 두고 친구들은 ‘강원도’라고 불렀다.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내가 인상 깊었나 보다. 나는 내가 어떻게 불리는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다.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하면서 지방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1학년 때는 친구 만드는 일과 노는 데 열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활동 반경도 넓어졌다.

“국창아, 니가 우리 학교 강원도 삼척군 출신 학우 모임 대표를 맡아라. 그리고 강원도 학우회로도 진출하자!” “그래, 니가 가장 적극적이잖냐. 강원도의 힘을 좀 보여주자.”

학우회장을 맡은 뒤 수첩 속 친구들 명단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났다. 이전까지의 나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고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상경한 뒤 나는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발 넓은 리더가 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만큼 신나게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등산 바둑 당구 탁구 족구 볼링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면서 인맥도 넓혔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져 집에서 보내준 하숙비를 홀랑 쓴 뒤 입주 과외를 하면서 부족한 돈을 메운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 사람과 관계를 배우고 알아간 것이 대학생활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취업문이 좁디좁아진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는 말일 수 있겠지만 내 지론은 변함이 없다. ‘사람 공부가 먼저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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