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눈물 내리는 마음



피천득 선생의 수필 ‘눈물’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피에타를 기억하는 이유는 마리아의 보이지 않는 눈물 때문이라고 한다. 이 눈물과 함께, 선생은 수많은 눈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말한다. 그 정한(情恨)이 무엇이든 간에 비 맞은 나무가 청신하게 되듯이 눈물은 마음을 씻어준다고. ‘그랬구나! 그래서 눈물을 잘 흘리는 선생의 마음이 그리도 청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의 말미에 그는 “도시에 비 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이 내린다”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 ‘눈물 내리는 마음’이 독재자들에게 있었더라면, 수억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고 덧붙인다.

선생이 사용한 ‘청신’(淸新)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다.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는데,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의 깨끗함은 아마도 눈물 내리는 마음인 것 같다. 눈물이 마음속 탐욕을 씻겨 내리고 이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정화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눈물은 마음의 잘못을 짚어주는 방향등이다. 그래서 눈물 내리는 마음은 또한 늘 새로운 마음이다. 탐욕이 없으니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며 늘 새로우니 다른 사람에 대해 편견이나 선입견이 있을 리 없는 마음이다. 선생의 말처럼 지도자들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수억의 비극은 진정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그렇게 눈물 내리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들이 있다. 그중 한 분이 한국교회사의 기적이라고 평가받는 김교신 선생이다. 선생은, 기독교가 아직 정착할 수 없었던 혼란의 시기에 민족적 기독교에 대한 염원으로 ‘성서조선’을 창간했고, 이를 통해 신앙의 새로움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결국 성서조선은 폐간되었고, 선생은 폐간호에 ‘조와’(弔蛙)라는 제목의 권두언을 썼다. ‘조와’는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이라는 의미이다. 글은, 한편으로 모진 겨울에 동사한 개구리를 애도하며 한편으로 동사하지 않은 개구리를 통해 희망을 찾는 내용이다. 개구리에 빗대어 민족의 고난과 성서조선의 폐간을 슬퍼하는 그의 마음은 눈물 내리는 식민지 지도자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그러한 여전함은 젊은이들이 민족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그의 눈물은 한 식민지 청년을 역사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일화인즉,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예선을 위해서 동경 마라톤에 참석했을 때, 함께 갔던 이가 당시 양정고보 선생이었던 김교신이었다. 예선 중간 지점에서 선두가 된 손기정은, 그때 선도차에 탄 김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이 스승의 눈물만 바라보며 뛰어 우승했다고 한다. 손기정에게 스승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눈물 흘리는 스승의 청신함에서 하나님을 보았을까.

눈물, 그것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연결해주는 힘이기도 하다. 눈물로 탐욕과 편견이 씻기는 순간, 그때 잠시만이라도 우리는 새롭게 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시는 예수를 만난다. 역사를 이룬 것은 예수의 눈물을 따라 내린 수많은 눈물이다. 그 눈물을 따라 생명의 길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눈물 흘리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갈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날카롭게 칼을 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 나라도 눈물 흘리는 청신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게 된다.

김호경 교수(서울장로회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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