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영화 ‘기생충’의 예언?



115년 만이라는 집중호우가 영화 ‘기생충’을 다시 불러냈다. 2022년 8월 서울에 닥친 홍수 피해가 2019년 나온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기택이네를 통해 수해를 당한 반지하 주민의 참담함이 이미 생생하게 기록돼 있었다. 해외에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닥친 재난을 이 영화로 이해한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이번 반지하 주택 참사를 보도하며 ‘기생충’을 소환했다. 영화 속, 아니 현실 속 한국 고유의 주거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선 ‘banjiha’라는 우리 말을 그대로 써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예고된 희생을 막지 못한 것이다. 귀한 생명 여럿의 상실이 더 저리도록 아픈 이유다. 우리에게 ‘기생충’은 한국 최초 아카데미 수상작으로만 기억된다.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 영화의 진지한 경고를 듣지 않았다. 그 엄중함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음모론의 고향 미국에선 ‘기생충’을 ‘예언 프로그래밍(predictive programming)’의 하나로 여기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예언 프로그래밍이란 정부 혹은 권력 집단이 영화나 소설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통제함으로써 예정된 미래 사건을 더 잘 받아들이게 만드는 걸 말한다. 집단심리 기제를 활용해 사전 기획된 급격한 변화에 따르는 동요나 저항을 미리 방지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2011년 영화 ‘컨테이젼’이 코로나 팬데믹을, 1997년 방송된 애니메이션 ‘심슨’ 에피소드가 2001년 9·11 사태를 예언했다는 식이다.

근거가 박약하고 허무맹랑한데도 이런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는 뭘까. 대중문화 속 허구가 실제 현실이 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음모론보다 합리적 설명이 필요하다. 예외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부분 대중문화는 대중성을 최고 목표로 삼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애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살아내는 현실을 적절한 직설과 은유, 판타지의 조합으로 잘 엮어내야만 가능하다. 까다로운 대중의 입맛에 맞게 너무 앞서가지도, 너무 뒤처지지도 않아야 한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도, 너무 과장해서도 외면받는다.

그래서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 대중문화에서 제기되는 화두를 허투루 흘려버리지 말아야 한다. 터무니없는 예언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현실 고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반지하 주거는 80년대 중반 들어서 일반화됐다. 2020년 기준 전국에서 반지하 혹은 지하에 거주하는 가구는 30만을 넘었다. 서울만 해도 20만여 가구나 된다. ‘기생충’은 기택이네를 빌려 장마와 태풍 때마다 물난리 걱정에 잠을 설쳐야만 하는 이들의 위태로운 삶을 엄중히 경고했던 거다.

K컬처가 승승장구 중이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기생충’을 포함해 ‘오징어 게임’ ‘인간수업’ ‘DP’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등 우리나라와 해외에서 인기와 호평을 얻은 작품 다수는 아주 어둡고 암울한 배경이 특징이다. 기저에 종말론적 정서가 선명하다. 외국에선 한국 대중문화를 ‘잔혹동화’로 일컫는단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징후를 읽어야 한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들에 비친 한국 사회의 현실과 절망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막아야 한다. 또다시 예언이라는 조롱을 피하려면 지체할 수 없다.

이참에 대중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본다. 심심풀이 여가 활동으로만, 싸구려 상품으로만, 돈벌이 수단으로만, ‘국뽕’의 도구로만 취급하는 건 한참 부족하다. 더구나 인간 죄성(罪性)의 집약체쯤으로 치부하고 일절 거부하려는 태도로는 세상과 사람을 읽을 소중한 자원을 놓칠 수밖에 없다.

박진규(서울여대 교수·언론영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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