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앞에서 넋을 잃곤 합니다. 얼마 전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by RUBENS, Peter Paul 1631~32, Oil on canvas, 304x250㎝, Pinacoteca di Brera, Milan)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이 그림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한 부유한 여성이 자기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루벤스에게 의뢰해서 벨기에 한 교회의 제단화 일부로 쓰인 작품입니다. 여기엔 최후의 만찬이 담겨 있습니다.
빵을 든 예수님의 머리엔 후광이 둘러 있고 그분이 바라보는 하늘에서 빛이 내려옵니다. 깨끗한 흰색 식탁 위엔 한 잔의 포도주가 자기 순서를 기다립니다. 그 주위에 주님의 제자 열두 명이 빼곡히 둘러앉아 있습니다. 오른편 제단 위에 펼쳐진 성경과 두 개의 초는 참 신이요 참 인간으로 성육하신 그리스도가 이곳의 주인이라는 걸 암시합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최후의 만찬입니다.
특별한 건 이제부터입니다. 제자들의 시선이 이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방향이 제각각입니다. 누구는 예수를, 누구는 동료를, 누구는 빵을, 누구는 허공을 바라봅니다. 표정도 제각각입니다. 놀람과 당황, 호기심과 진지함이 온통 여기저기 뒤섞여 있습니다. 무엇보다 감상하는 나를 근심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이가 걸립니다. 배신의 색깔인 누런 망토를 입고 있는 걸로 봐서 가룟 유다가 분명합니다.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턱을 괴고 있는 그 사람이 감상자인 내 시선을 딴 곳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습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어딘지 불안합니다.
그림 속엔 감상자인 나를 응시하는 시선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음침한 식탁 밑 숨은 개가 무언가를 입에 가득 물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서양화에서 개는 믿음과 신뢰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개는 탐욕과 악의 배신자 가룟 유다의 동반자로 그려집니다. 고깃덩이를 문 개의 표정이 탐욕스럽다 못해 무섭습니다.
우리가 아는 최후의 만찬에는 빵과 포도주밖에 없는데 어디서 왔는지 고깃덩어리가 거룩한 식탁 밑에 숨어들어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장면을 보는 감상자는 성찬과 탐욕스러운 고깃덩어리가 한 방에 함께 있다는 걸 압니다.
루벤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그림은 가룟 유다의 근심 어린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거룩한 생명의 양식을 함께 나눌 것인가. 아니면 식탁 밑의 개처럼 몰래 자기 배만 불릴 것인가.’ 거룩한 식탁 주변엔 제자도 있고 개도 있습니다. 거룩한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그림은 비단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나눔과 감사를 잃고 탐욕과 아집으로 물들어가는 우리 시대를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의 장면, 하나의 사건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합니다. 같은 식탁인데 예수님 손에 들린 거룩한 빵 그리고 탐욕스러운 개의 고깃덩어리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오늘’이라는 혼란한 세계를 통과하는 우리는 둘 중 하나를 먹게 될 겁니다. 가룟 유다의 심상찮은 눈빛이 ‘너도 둘 중 하나 아니냐’며 다그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예수가 되든지 아니면 개가 되든지! 아무래도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불편합니다.
그림을 보며 다짐합니다. ‘오늘’이라는 우리의 세계는 부정과 뻔뻔함이 득세합니다. 하지만 음흉한 자리에서 고기를 탐하는 개가 아니라 예수님 손에 들려 이웃의 허기를 채우는 거룩한 빵으로 살고 싶습니다.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