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란 일상을 건강하게 살아내는 힘이라고 믿는다. 흔히 내공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믿음이 좋다는 말 등은 모두 그런 뜻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빌 4:12)며 이는 곧 자족하는 삶이라 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삶의 지혜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바른 영성을 깨닫고 간직했다는 말이다.
‘시대의 역설’이란 글에서처럼 만만치 않은 세상임은 분명하다. 분명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세상살이는 더 까다롭고 불편하며 무겁다. 무엇보다 힘든 건 제 마음 지키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정보와 변화들이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며 우리를 흔들고 있다. 보면 다 필요한 것 같고, 다 좋아 보이니 외면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다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안 된다. 분주한 일상과 변화 앞에 마음은 조급해지고 불안하며 알 수 없는 실망과 좌절감에 빠질 수 있다.
영성이 일상을 꿋꿋하게 살아내는 힘이라면 그건 특별한 건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마음처럼 생태적 감수성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무위자연이란 말처럼 사람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을 수 있으며, 저마다의 존재와 소중한 역할을 보며 위로와 힘을 얻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그 어리석음만큼 크고 무모하다. 그것을 지혜라고도 말하고 능력이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신적 자리로까지 거침없이 달려간다. 최재천 교수의 말처럼 현명한 호모사피엔스(지혜로운 인간)가 아니다. 먹고사는 존재의 필요성 때문이 아닌 귀신에 홀린 듯 소유하고 지배하며 새로운 것을 탐하는 허황된 탐욕과 욕망으로 치닫고 있다. 그 끝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남과 가족까지 파멸의 길로 끌고 들어간다.
바른 영성을 가진 사람은 겉의 화려함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렇다. 어렵고 힘든 일에도 쉽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반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과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항상 감사와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갈 힘이 있다. 내 뜻대로 되면 감사하지만 우쭐하지 않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기뻐하며 살 수 있음은 그분의 뜻과 섭리가 나보다 높고 옳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채워진 마음은 기독교 영성이 아니며, 낙심과 불안도 예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주머니와 두 벌 옷도 필요 없다. 달랑 지팡이 하나만으로 족하다”(막 6:8∼9) 하실 땐 세상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은총과 힘이 그들에게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은총을 우리 안에 주셨다. 진짜 기쁨은 내면의 기쁨이요 참 행복함도 내 안의 행복이다. 외부로부터 기쁨과 행복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은 늘 불안하고 자유롭지 못하다. 기쁨과 행복도 잠시이고 더 크고 자극적이어야 만족이 된다. 결국은 끝도 없는 허기와 궁핍이 그를 불행하게 하고 노예처럼 다루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면으로 오시고 내 안의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얼마든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과거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지금 여기를 소중하게 여기며 산다.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이 이웃과 자연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기에 모든 걸 사랑할 줄 안다. 기독교의 영성은 특별한 무엇을 꿈꾸거나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일상을 건강하고 아름답도록 꿋꿋하게 살아내는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백영기 쌍샘자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