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자연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힘을 다해 어려움당한 사람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병들고 헐벗은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궁핍입니다.
영적으로 궁핍한 것이 심각하고 두려운 것은 배고프고 병든 것과 달리 스스로 깨닫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부유해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계 3:17)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지만 영적으로는 궁핍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그런 형편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영적 궁핍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늘 그렇게 살았기에 분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그리스도인이 두렵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으니 은밀한 죄를 짓고 혈기를 부리고 다투고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허탄한 농담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처음 지방회에 참석했던 날, 지방회는 두 편으로 갈라져 고성이 오가고 삿대질을 하며 싸웠습니다. 그러던 중 추도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목사와 장로들이 싸우다가 그대로 예배드릴 수 있는가 말입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몸이 아프면 고치려 하고 헐벗으면 입을 옷을 구하게 됩니다. 절박한 처지에 빠지면 누구나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은 자신이 잘사는 줄 알고 편안한 줄 알고 느긋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성령께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궁핍한지 아닌지는 삶의 변화가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에게는 뚜렷한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은밀히 짓는 죄를 청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끊임없이 염려하며 살고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가난이나 질병, 실패나 환란,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실제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지만 자기 성질대로 믿는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영접하면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마음에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면 어떻게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접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요 15:5)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형편에서도 주님의 열매가 맺힙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동행일기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임을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계속 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을 정말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삶 전체가 바뀌는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