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때로 무엇을 보고 열광하며 무엇을 보고 실망하는가.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스콧 솔즈의 ‘선 안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혁명가들에 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그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하나님도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사한 바로, 교회를 떠나면서 하나님과 완전히 멀어진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더 많이’ 원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더 건강한 신앙 경험들을 짜깁기해서 진지한 신앙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서 혁명가들이란, 교회에 다니지 않는 크리스천을 말한다. 조지 바나라는 신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반항’보다는 ‘좌절감’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 싶어서, 진정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문제는 세상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좌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면 참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무엇일까.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선한 목자의 비유’가 나온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 목자는 결코 양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보통 때는 선한 목자인지 삯꾼 목자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처럼 ‘사랑’에 대해 많이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정작 세상은 그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에서 그 사랑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것은 아닐까. 아니, ‘이 정도의 사랑’은 보여줘야 크리스천으로서의 품위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진정한 예수님의 성품이다. 삯꾼으로 살지 않고 선한 목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 성품의 특징은 뜨거운 가슴과 눈물, 그리고 연민으로 사람을 돌보셨다는 것이다. 율법이나 원칙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늘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찾아 위로해 주셨다. 예수님은 사람 만나기를 꺼린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셨다.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던 삭개오가 돌감람나무에 올라가 있을 때 눈을 맞춰주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기에 앞서 위로해 주셨다. 예수님을 통해 보는 진정한 목자의 성품은 늘 ‘양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우리가 온유한 성품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늘 누군가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늘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고전 10:23)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로 부름받은 사도 바울의 고민이다. 복음으로 자유로움을 입었다는 기쁨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품이 온유하다고 믿는 이유는 늘 양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세상도 우리를 보고 ‘온유한 성품’을 가졌다고 믿었으면 좋겠다.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