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한가 했더니 그 이름이 다시 세간에 오르내린다. 전광훈과 그의 신도들이 서울 재개발 지역에서 이른바 ‘알박기’로 서울시 감정액인 84억원의 8배에 달하는 650억원 보상금 및 대토를 받은 과정과 여러 행적이 전국에 방영됐다. 한국 교회에는 악몽 같은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독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고 조롱이 끊이지 않는데, 전광훈의 거친 언동과 상궤를 벗어난 행보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상을 주니 말이다. 한국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가 교인들에게 그가 주최하는 집회의 참여 자제를 권한 것도 이런 위기의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보통 교회와 교인들이 전광훈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그의 언행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강변하는 것으로 교회의 추락한 위상이 올라갈 것 같지 않다. 한국 교회가 진짜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전광훈이 극단으로 표출하는 교회 안의 비기독교적 요소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필요하다.
우선 한국 교회는 손해 보려 하지 않는다. 순교자를 낳은 역사가 무색하게 교회는 어떤 불이익에도 분연히 일어나 맞선다. 교회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상이 받아들여야 하고, 교회에 불리한 법과 제도는 모두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요하면 법을 어기기도 하는데, 그 대가로 기꺼이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법을 밟고 서려 한다. 전광훈과 그의 신도들이 3심까지 소송에서 모두 패하고도 강제집행에 불응하며 자기 이익을 지킨 것은 그 기본적 태도의 증폭된 발현일 뿐이다.
법을 이기되 힘으로 이기려는 것도 비슷하다. 전광훈과 그 신도들은 자기 건물에 대한 법원의 강제집행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집행 노무자를 폭행하고 전봇대 꼭대기에 서서 몸을 던지겠다고 협박하는 등 순전히 물리력에 의지해 ‘승리’했다. 이들의 폭거와는 다르지만 교회도 성경적 원리보다 돈과 권력과 숫자의 힘을 앞세우고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전광훈과의 교류 자제를 권고한 예장통합 총회는 같은 자리에서 상식, 법률, 기독교 정신에 다 어긋난 명성교회 세습을 용인했다. 주먹을 쓰진 않았으나 이긴 것은 결국 대형교회의 힘이다.
사람의 독재를 허용하는 것은 또 어떤가. 전광훈은 이번에 쟁취한 자금의 모든 사용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한다. 나아가 자기 아들을 ‘독생자’라 부르며 그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승리를 위해 누군가는 전봇대에 올라가 목숨을 걸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상상하기 힘든 독재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어났는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전횡이 교회 안에서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묵묵히 헌신하는 이가 훨씬 많지만 크고 작은 왕처럼 군림하는 목회자도 적지 않다. 지나치지 않다 해서 용인할 일이 아니다. 독재는 반기독교적이다.
목적이 옳다면 수단은 상관없다는 결과주의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위해 폭력도 불사한 전광훈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몇 년간 많은 교회와 교인이 ‘좌파’를 몰아내자는 목표 때문에 그와 결탁한 것이 좋은 예다. 전광훈의 정치운동 능력을 높이 산 나머지 그가 신성모독을 하고 반사회적으로 행동해도 다 눈감았다. 이제 와서 슬그머니 발을 빼며 전광훈은 지나치고 우리 건전한 기독교인은 다르다고 하려니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손해를 기쁘게 감수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사람의 힘이 아닌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만인이 똑같이 서는 기독교의 민주적 원리에 순복해야 한다. 목표가 같다며 불의한 자의 뒤에 숨었던 사람은 그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그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 전광훈과 제대로 결별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