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정희 (14) 빈혈에 시달리면서 잘 먹지도 않자 ‘별난 아이’ 별칭

중학교 1학년 소풍 때 미인대회에 뽑혀 왕관을 쓴 서정희(오른쪽)와 어머니 장복숙씨. 동네 미용실의 도움으로 고전적인 머리를 하고 한복을 입고 있다.


새벽 4시. 어김없이 눈을 떴다. 하나님께 기도부터 드렸다. 살아있음에, 깨어남에 감사했다. 오랜 습관은 잘 변하지 않는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미명에 따뜻한 물 한 잔을 식탁에 놓고 앉으니 어린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꽤 지대가 높은 곳에 살았다. 촘촘하게 이어진 허름한 집들 전봇대 사이에 우리 집이 있었다. 엄마와 외할머니, 언니와 나, 남동생, 여동생까지 네 남매, 모두 6명이 살았다. 남자라고는 어린 남동생 하나 뿐이었다.

가끔 입안에 ‘국민 영양제’였던 원기소를 넣어주시던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네 살 밑 막내 여동생은 아버지의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때문에 엄마는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엄마의 자리는 외할머니가 대신했다. 엄마는 용산 미8군 부대에서 일했다. 식당에서 종일 일하고 퇴근할 때면 우리 가족이 먹을 탄산음료를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오셨다. 엄마는 우리를 먹이고, 때론 팔려고 미제 물건을 집에 가져오셨던 것 같다. 또 남아도는 식당 냅킨이나 고양이가 그려진 시리얼을 들고 왔다. 당시 주변에 시리얼을 먹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가난 덕에 얻게 된 혜택이라고 할까.

시리얼 상자에는 점선이 새겨 있었다. 점선을 꾹꾹 눌러 ‘탁’하고 뚜껑을 열면 이중 기름종이로 만든 봉지가 보였다. 시리얼은 봉지 안에 있었다. 얼른 질긴 봉지를 반으로 잘라 우유를 부었다. 졸졸졸. 우유를 따를 때면 침을 꿀꺽 삼키곤 했다.

그릇에 담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꼭 그렇게 봉지째 시리얼을 먹곤 했다. 배가 고파 먹어서 그런지 정말 꿀맛이었다. 우리 남매 모두 그 순간만큼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깔깔 웃다 시리얼이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부잣집이 된 듯했다.

매일 저녁 엄마의 퇴근을 기다렸다. 실제는 맛있는 먹을 것을 기다렸다. 엄마는 쉼 없이 일했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작은 체구인 나는 빈혈에 시달렸다. 잘 먹지도 않고 입을 꽉 다물고 구석에 앉아 있으면 외할머니는 “별난 아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정희야. 제발 밥 좀 먹어라.”

“먹기 싫어요.”

“쓰러지면서 왜 먹지 않지? 언니 동생처럼 아무거나 잘 먹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니까 그렇게 키가 안 크지….”

외할머니의 잔소리는 늘 같은 레퍼토리였다. 지금은 안 계신 외할머니가 그립기만 하다. 외할머니가 가끔 마당 한가운데 있는 우물의 펌프질을 시키곤 했다. 나는 온몸을 던져 펌프에 매달렸다. 힘이 모자랐다. 마중물을 넣고 펌프를 누르면서 우리 집도 부잣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밝게 자랐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 다음에 부자가 될 거야. 공주 옷을 입고 도우미 아줌마가 주는 음식을 먹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부자를 향한 꿈은 결혼을 하고 교회에 다닌 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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