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교외 언덕에 악명 높은 강도가 살았다. 그 집에는 강도보다 더 악명 높은 철제 침대가 있었다. 악당은 걸핏하면 오가는 행인을 붙잡아 침대에 강제로 눕히고 엽기행각을 벌였다. 침대보다 작은 사람은 팔다리를 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침대보다 큰 사람은 팔다리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살아나온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었다. 침대는 주인이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는 ‘제멋대로’ 침대였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악당을 같은 침대에 매달아 똑같은 방식으로 죄를 물은 후에야 죽음의 행진은 멈춰 섰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다. 침대의 저주는 여기서 끝난 걸까.
며칠 후 생일을 맞는 종교개혁에도 침대의 저주는 어른거렸다. 종교개혁은 개신교 탄생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지만 아름다운 자산만 남긴 게 아니다. 그 몇 배나 되는 역사의 부채도 함께 남겼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서야 할 교회가 가장 높은 자리를 탐할 때, 교회가 휘두른 진리의 칼날은 ‘나 홀로’ 정의가 돼 무수한 사람을 잡는 올가미가 됐다. 평화의 사도가 돼야 할 교회가 최고 승리자의 자리를 탐할 때, 교회가 높이 쳐든 성서는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다양한 고백을 무참히 내리찍는 무기가 됐다.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절대반지’를 향한 무한 질주에 모든 개혁은 물거품이 됐다. 아니 죽음의 행진으로 이어졌다.
30년 전쟁, 긴 시간 유럽대륙은 교리 전쟁의 도가니였다. 로마의 박해 아래 300년간 죽어간 초기 순교자들의 총합보다 더 많은 숫자가 단 하루 만에 주검이 되기도 했다. 천국열쇠를 받아든 사도 베드로를 내세운 가톨릭도, 바울이 쓴 로마서를 들고 성경만이 진리라고 외친 루터와 칼뱅의 새로운 복음도 피만 불렀다. 유럽대륙 전체를 호령했던 천년 기독교가 수천, 수만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간 살상 무기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불신의 늪에 빠져든 기독교는 종교의 급속한 세속화를 불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또 다른 성적표다. 내 생각 내 믿음 내 신앙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모두를 적으로 돌릴 때 그 결과는 참혹함만 남는다.
그릇된 신념은 그릇된 신앙을 낳는다. 그릇된 신앙은 타인을 다치게 하고 종국에는 자기파괴를 부른다.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그릇된 신념을 일컬어 ‘자기 우상화’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은 절대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는 순간, 누구든 그 거대한 늪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기 우상화에 빠지면 출구를 찾기 어렵다.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얄팍한 경험이 한낱 먼지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을 다 아는 듯 모든 사람을 자기 심판대에 세워 멋대로 판단하고, 세상을 제멋대로 붙였다 떼며 ‘하나님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독성이 강하다. 마약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크신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이 만든 세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분이 만든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저 우리가 아는 세계는 깃털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얕은 경험치에서 나온 상상력이 전부지만 그 안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있음에 겸손하게 살아갈 이유가 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계속됨을 믿는다면 서로 다른 경험치를 가진 이들과도 길벗으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큰 개혁은 없지 싶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다. “가난한 교회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읽는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가 행복한 사람이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하희정 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