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동네에서 영화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렸다. 친척들이 내가 고모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작은 체형으로 얼굴도 작고, 예민한 성격까지 고모를 닮았다.
반면 외가 쪽은 키가 장대 같이 컸다. 털털하고 통 큰 외가와 비슷한 점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아버지 친가 쪽을 많이 닮은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서서히 엄마와 외가 쪽을 닮아 가는 듯하다. 아픈 중에도 먹성이 좋고 털털해지는 것, 그다지 예민하지 않는 것 등. 외가 친척들처럼 넉넉한 아줌마가 되고 있다.
사실 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진한 눈썹과 쌍꺼풀, 두툼한 입술, 외국인 같았던 아버지. 레코드사에 다니던 친척 덕에 우리 집에는 없는 살림에도 음악과 관련된 것들이 제법 많았다. 축음기며 릴 테이프, 도넛판 같은 것들. 지금은 골동품 가게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미닫이 찬장처럼 생긴 전축문을 열고 음악을 틀던 아버지와 그 앞에서 춤을 추던 내가 어렴풋이 기억 난다.
레코드판에서 흘러 나오는 일본 노래나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노래를 종알종알 따라 불렀다. 그러면 아버지는 귀엽다고 흐뭇하게 쳐다보셨다. 달려가 안기면 아버지의 가슴 근육이 날 밀어냈다. 반동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지금 표현으로 아버지는 ‘몸짱’이셨다.
팔뚝에 매달려 빙빙 돌려 줄 때면 어지러웠다. 깔깔대며 웃다 이불바닥에 던져지고. 어지럽다고 손가락으로 빙빙 도는 흉내를 내는 나를 쳐다보던 아버지. 그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31세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나는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의 부재는 정신적 결핍으로 다가왔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유년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내 삶을 지배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땐 참 어색한 하나님 아버지였다.
그래서일까. 어떻게든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불안감이나 두려움, 외로움을 물려주기 싫었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고 버텼던 나의 결혼생활.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짧은 기억이지만, 좋은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이제는 안다. 지나온 상처가 지금의 나를 견고하게 지켜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상처가 남긴 흉터가 오히려 훈장이 돼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돌보셨다.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른, 작은 꼬마를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5)
“사랑한다 정희야. 사랑한다 정희야.” 오늘도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