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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목사의 신앙으로 세상 읽기] ‘엄한 사랑’도 있다



‘온유함’에 대한 오해가 있다. 목회자에게는 대체로 ‘착한 목사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목회자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니,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콤플렉스 역시 같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며 욕을 먹고 싶지 않기에 방관하는 것들이 있다.

특히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참을지 말지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은 옳지 않다. 중요한 것은 화를 내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이다. 너무 이상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면 이렇다. 감정에 치우쳐 화를 내는 것은 문제이지만 감정을 다스리며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하다.

예수님의 모습으로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있다. 양을 안고 하염없이 인자하게 느껴지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선함’은 ‘엄격함’과 짝을 이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고백했던 선한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안위하는’ 그런 사람이다. 여기서 ‘안위’라는 말은 NIV 성경에 ‘comfort’라는 단어로 표현돼 있다. 말 그대로 지팡이와 막대기가 위로와 평안을 준다는 말이다.

막대기는 목자가 양들에게 방향을 지시하면서 맹수와 싸우는 무기이며,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 있어 잘못된 길을 가는 양을 걸어 넘어뜨리는 훈육의 도구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한 손에는 지팡이와 다른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드셨다. 죄인들과 세리들에게 한없이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질책하며 분노하셨으니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잘못된 삶을 돌이키기를 원하는 목자의 마음을 갖고 계셨다.

이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엄한 사랑’이다. ‘엄한 사랑’은 ‘온유함’보다 훨씬 힘들다. 이것은 삯꾼 목자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성품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나쁜 평판 듣길 원하지 않는다. 힘들고 어려운 말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세브란스병원엔 유명한 외국인 의사, 인요한 선생이 있다. 그 옛날 우리나라에 의료 선교사로 헌신했던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라도에서 결핵 환자를 보살피던 시절, 억울하게 욕을 먹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입원 환자 중에 규율을 안 지키고 술을 먹은 사람을 내보내야 할 때, 그 환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고, 누런 가래를 뱉고는 나가버렸습니다. ‘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국 사람들에게 저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참으려고 애쓰던 아버지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떠나갔던 그 환자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돌아와 잘못을 빌고는 다시 치료받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평온을 깨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엄한 사랑의 명확한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헌신적인 행동’이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감정적으로 화를 참지 못해 후회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엄한 사랑을 하지 못해 후회하는 일이 더 많다.

엄한 사랑은 ‘전략적 분노’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 나오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이기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다. 이 세상이 우리를 통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온유함만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양들에게 보여주셨던 엄한 사랑이다.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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