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가르친 제자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제자를 종에 빗대어 말한 내용이다. 종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집으로 돌아와도 앉아서 쉴 수 없다. 집에서도 부지런히 일하여 주인이 먹을 것을 장만하고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들어야 한다. 그렇게 일했다고 해서 종이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기대할 수 없다. 종이 주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종의 숙명은 참 가엽다. 그렇게 일하고도 감사의 위로나 격려 따위를 요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종의 이러한 상황은 예수가 언급한 ‘무익한’의 헬라어 의미를 새겨보면 이해가 간다.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무익한’의 원래 의미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 즉 자신을 주장할 권리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익한 종은 주인이 시키는 것이면 무조건 일을 할 뿐, 불평도 가당찮고 대가도 요구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을 종으로 붙여주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힘든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주인의 집에서 일할 수 있다면 족하다. 예수는 묵묵히 맡겨진 일만을 감당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라고 말한다.
왜 제자는 무익한 종에 불과한가. 수많은 일을 함에도 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제자가 하는 많은 일의 열매를 제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한 이는 오직 하나님이다. 심는 것과 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박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자라게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것도 반박 불가하다. 그러니 심는 일이나 물 주는 일을 하는 자들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심은 자와 물 주는 자의 수고를 의미 있게 만드는 존재는,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뿐이다.
책이나 드라마에 종종 이런 장면이 나온다. 집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매번 아버지의 밥주발을 챙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아버지가 돌아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밥주발은 지속되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생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밥주발은 슬프다.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해도 어머니는 그 밥주발로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이 군대 간 내내 불을 때지 않은 골방에서 지낸다. 어머니의 골방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들의 훈련을 덜어주거나 편안한 군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결과도 일으키지 않는 어머니의 밥주발과 골방, 자신의 수고만 쌓는 그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와 상관없지만 소중한 사랑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떤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사랑은 무익하다. 그러나 그 무익한 사랑은 언젠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렇게 소리 없이 이루어진 사랑으로 누군가는 비로소 스스로 새로운 삶을 걷는다. 무익한 사랑은 무의미한 사랑이 아니며 무익한 종은 무의미한 종이 아니다.
제자란 무익한 종에 불과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아마도 제자들 스스로가 이렇듯 무익한 사랑을 하는 자임을 알라는 가르침인지 모르겠다. 제자가 하는 수많은 수고로움과 헌신과 봉사의 열매는 제자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자랑할 것도 공치사할 일들도 아니다. 그 모든 열매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니 제자라면, 무익한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 있을 뿐이다. 종은 진정으로 주인이라는 반사판하에서만 빛을 얻는다. 종의 자체 발광이란 어불성설이다. 종은 무익하고 주인은 사랑이 넘친다.
김호경 교수(서울장로회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