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교회 부흥 프로그램



초대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로드니 스타크에 따르면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던 313년 당시 로마제국 총인구의 10%가 교회 소속이었고, 이전 3세기 동안 교회는 통계상으로 10년마다 평균 40%씩 증가했다고 설명한다. 이건 무척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예비 사형수들의 모임이라고 할 정도로 정부 감시와 박해 가운데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교회가 지속해서 급성장을 이뤄냈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로마인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리스도인이 보여준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었다. 이들은 밤에 모였고 공동식사 자리엔 상류 지식인뿐 아니라 로마인들 보기에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하층민’도 동석했다. 예배 모임은 배타적이었지만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눈에 보이는 공통점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결속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로마인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은 종교예식을 중심으로 남녀가 형제애와 자매애로 똘똘 뭉친 매우 이상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을 향해 한쪽에선 비난과 험담을 아끼지 않았고 다른 한쪽에선 자발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 순교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특이한 건 당시 초대 교회엔 눈에 띌 만한 전도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집중했던 것은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공동체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가르쳤을 뿐이다.

실제로 최근 교회역사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복음 전도를 실시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2세기 즈음부터 교회는 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금지했다. 기독교가 불법이던 세계에서 첩자나 밀고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교회는 집사들을 정문에 세워 놓고 사람들을 점검하고 구별했으며 신원이 분명하지 않은 낯선 사람을 경계했다.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세례 교육 과정이 최소 3년에서 5년까지 길게 걸린 이유도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무슨 신학적인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긴 교육과 점검이 필요했던 게 아니다. 그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확실한 신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교회에서 세례받고 먹는 것(성찬)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초세기 교회가 존재의 위기를 겪었던 사회적 현상의 흔적이다. 하지만 박해가 없던 시기로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세례받고 먹는 경우도 있지만 거꾸로 먹고 세례받는 경우도 흔하게 확인된다.

초세기 교회가 성장했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예배 형태가 매력적이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3세기 이전 기독교 예배는 비신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설계된 게 아니었다. 요즘 유행하는 ‘구도자 예배(seeker-sensitive)’란 것은 당시 상상할 수 없었다. 혹여 1~3세기 기독교 예배가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건 거룩한 예배의식 때문이 아니라 교인 개개인의 삶의 모습과 의식 수준 그리고 그들이 이룬 공동체의 특별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단지 외부인에게 호기심을 자아내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을 뿐이다. 삶이 중요하다. 혹여 예배 때문에 비신자들이 교회로 전도됐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의 화려함이나 거룩하고 감동적인 예배의식 때문에 잠깐 올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초기 교회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슨 프로그램이나 특별한 예배로 교회 부흥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백만이 모인들 무엇에 써먹겠는가. 교인들의 ‘신념’ ‘우선순위’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 삶을 위해 예배가 있는 것이지 예배를 위해 삶이 있는 건 아니다. 삶은 없고 예배만 매달리다 나가떨어지고 탈진하는 건 자명한 일이다.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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