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신다/ 나는 한평생을 기도로 살아왔느니라/ 낯선 서울 땅에 올라와 노점상으로 쫓기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면서도/ 남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음에/ 늘 감사하며 기도했느니라/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 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박노해, ‘감사한 죄’ 중에서)
시인의 팔순 노모처럼, 짧은 순간 안도하는 숨소리를 낸 기억조차 날카로운 칼날에 손을 베인 듯 아프다. 거친 바람도 불지 않고 거센 비도 내리지 않은 멀쩡한 2022년 가을날에, 우린 또 156명이나 되는 믿기 어려운 숫자의 젊은 넋들을 무력하게 잃고 말았다. 세월호의 아픔도 상처 그대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8년이라는 시간을 어렵게 보내고 이제는 포스트코로나 시대 운운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대한민국은 돌고 돌아 또 그 자리다. 있을 수 없는 참사를 내고도 빠져나갈 궁리만 하다 제 무덤을 파고 만 정부 책임자들의 어리석음도 일관되게 똑같다. 아니 이번엔 영정도 위패도 없는 ‘묻지 마’ 애도 퍼포먼스로 희생자와 유족을 두 번 죽였다. 행정 부재가 낳은 참사임이 드러났는데 1주일이 지나도록 사죄하는 이도 책임지는 이도 없다. 되려 ‘책임지겠다’가 아니라 ‘책임을 묻겠다’ 말한다. 이것이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한다. 국민 안전의 최고책임자인 정부가 대한민국의 최대 리스크로 떠오른 오늘의 현실이 참담하고 암담하다.
그래도 절망적 현실에 냉소하지 않고 진심으로 애통해하는 이들이 있어 큰 위로를 얻는다. 메가폰도 없이 목이 쉬도록 현장에서 고군분투한 한 경사가 눈물로 사죄한 인터뷰를 보았다. “참사에 희생되신 한 분의 어머니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더라. 전 고맙다는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닌데,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했는데 면목이 없고 죄송하다.”
아무 권한도 없는 평경사가 오열한 눈물 사죄는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이 해야 할 몫이었다. 그 경사는 “제복을 입었든 입지 않았든 경찰관이든 소방관이든 시민이든 모두 나서서 구조 활동을 도왔다”고 덧붙이며,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도 평범한 젊은이들은 수준 높은 시민의식으로 대응했음을 증언했다.
하늘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누구도 헤아릴 길 없으며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 살갑던 자식이 한순간 증발해버린 상황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황망하기 그지없는 순간에도 애써 준 경사를 찾아 고마운 마음을 전한 유족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적신다. 위로를 받아야 할 이가, 되려 마음 다친 시민들에게 위로를 주는 상황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유체이탈’로 힘없는 일선 경찰에 책임을 떠넘기는데, 경사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지역민들의 시민의식은 또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 내 가족인 듯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시민들도 혼자 숨죽여 우는 이들에게는 큰 위로다.
슬픔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라고 세상의 상식은 말하는데,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타인의 고통을 대가로 얻은 것은 그게 뭐든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하는 것만 죄가 아니다.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중한 죄다. 어떤 애도 퍼포먼스를 하더라도 면죄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하희정 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