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1월이 되었다. 교회력으로는 11월이 한 해의 끝이고 보니, 지금은 지내온 시간을 돌아보는 때다. 예기치 못했던 사건과 사고들로 인한 슬픔과 절망, 참담한 분노도 차분히 마무리해야 하고, 한 해 동안 지내온 화려한 순간들에 대한 기억도 마땅한 정리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에나 돌아보면 아쉽고 부족한 시간이 있었겠지만, 또한 어느 누구의 시간도 안타까움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예기치 못한 은혜와 감사의 시간이 삶의 곳곳에는 들어있다. 우리의 능력 밖에서 일어난 무수히 많은 일은, ‘은혜’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것이 슬픔과 좌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추수감사절이 이 시기에 있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것이어서, 각 교파나 나라에 따라 9월이나 10월에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경우도 있고, 지금 우리가 지내는 11월이 너무 늦다는 견해도 있지만 나는 이때 감사를 되새기는 것이 마음에 든다. 추수라는 것이 반드시 농사의 열매에만 한정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추수는, 한 해를 보내며 수많은 위기와 기쁨의 순간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돌아보다 보면, 어느 때에는 손에 쥔 기쁨이 너무 적을 때도 있고 어느 때에는 분에 넘칠 때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돌아보면, 손에 쥔 어떤 것들만으로 삶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하기에는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많이 갖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빈털터리 슬픔 속에서도 웃는다.
죽음의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믿음을 잊지 말라는 내용의 요한계시록은, 삶이란 손에 쥐고 있는 것 때문에 울고 웃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손에 쥐고 있는 것 너머의 것들이 있다. 극심한 환란의 위협 속에서 비참한 현실의 사람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다른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환란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4장과 5장에서 저자가 본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 보좌를 둘러싼 24명의 장로,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고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진 네 생물을 본다. 그러나 저자는 단지 환상을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향한 네 생물과 24 장로들의 찬양 소리를 듣는다.
환상은 또한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있는 일찍 죽은 것 같은 한 어린양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네 생물과 24 장로는 그 어린양을 새 노래로 찬양하며, 이 찬양에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천사의 찬양이 더해진다. 일찍 죽은 어린양의 보잘것없는 모습과 달리 그를 둘러싼 소리는 점차 웅장해지며 여기에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 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의 찬양이 더해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한마음으로 하는 그 거룩한 찬양은, 요한계시록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어린양의 거룩함과 승리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며, 참여할 수 있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거룩한 찬양에 참여하는 네 생물과 24 장로는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들고 있다. 제의에서 빠질 수 없는 이 향은 성도의 기도다. 볼 것과 들을 것으로 가득했던 환상에는, 죽음에 내몰려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며 하는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향기가 넘쳐난다.
이 향기는, 고통 속 현실을 하늘의 승리로 이어주며 죽도록 충성하리라는 믿음의 열매로 남을 것이다. 만족할 수 있는 현실과 수확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나 진정으로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는다면, 지금이 감사의 때임은 분명하다. 한결같은 주님의 임재를 찬양하는 감사의 기도는 향기가 되어 보잘것없는 우리를 어린양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이끌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수확이 아니겠는가!
김호경 교수(서울장로회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