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쯤인 것 같다. 우리집에 들른 교회 집사님이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집사님이 타고 온 자전거를 갖고 놀다가 양쪽 바퀴 바람을 다 빼고 말았다. 아버지는 노발대발 꾸중을 하시는데, 집사님은 크게 한번 웃으시고는 자전거를 손수 끌고 나갔다. 그때 그분 집이 가까운 곳은 아니었기에 많이 미안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달 초, 그 집사님이 사는 전남 진도에 다녀왔다. 자전거 사건 이후 집사님의 삶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던 일을 관두고 신학에 입문해 목사님이 됐다. 그는 지도 한 장 들고 아내와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진도 땅을 밟았다. 천막교회부터 시작해 그 동네에 조그만 교회를 지어 38년 동안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데 진력했다.

팔팔했던 시절, 생기 넘치는 도시에 왜 나오고 싶은 맘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시무하는 교회 식당 벽에 걸린 액자 속 ‘목양일념’의 문구처럼 교회와 성도와 마을을 지키고 돌보는 일 말고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리고 삼남매 말고도 고아 2명을 함께 키워 떠나보냈다. 삼남매 중 아들은 목사가 됐고, 첫째 딸은 선교사가 됐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랐음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진도에 있는 그 목사님 교회에 들른 건 그가 현역에서 물러나고 후임 목사를 세우는 예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한 시골교회에는 이날 교회 설립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5분 남짓한 목사님의 사역이 동영상으로 파노라마처럼 소개됐다. 1980년대 초 천막교회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역을 담담하게 담아낸 내용이었다. 이어 축사자로 나선 장로 출신의 내빈이 마이크를 잡았다.

“내가 목사님과 교제한 지 40년 가까이 되는데, 이 동영상에 소개된 내용과 목사님의 실제 삶 내용이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이분을 알고 지낸 게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목사님이 뚜벅뚜벅 믿음대로 맡겨진 사명을 다해 살아왔다는 얘기로 들렸다.

목사님을 만나기 며칠 전엔 동년배 선교사를 만났다. 그 선교사는 20년 넘게 해외에 머물면서 3년 전부터는 슬로베니아 선교를 준비하며 접경국 헝가리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런 그가 한 달 넘게 홀로 한국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사연이 있었다. 올봄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그는 장남인데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출입국이 여의치 않던 때였다. 어머니마저 암투병 중이었는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해 한 달 넘게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수년 만에 마주한 그는 몸이 퉁퉁 불어 있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 때문이라고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면 마비에 대상포진에 무릎 부상과 기타 다른 질환에 많이 시달렸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 보인다”고 안타까워하자 “하나님은 귀하게 쓰는 종도 있고, 나처럼 막 부려먹는 종도 있다”며 웃어넘겼다. 그러면서 음식이 식는 줄도 모르고 선교지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도대체 복음이 뭐기에 저렇게까지 목숨을 거는 걸까. 그와 헤어진 뒤 틈틈이 밀려드는 질문이었다.

깊어가는 가을 한복판에서 또 다른 이를 만났다. 이번엔 지면을 통해서였다. 경북 봉화의 아연광산 매몰 사고로 221시간 동안 지하 199m에 갇혀 있다가 생환한 박정하씨였다. 언론마다 그와 동료의 생존 비결로 ‘커피믹스’를 꼽을 때, 박씨의 어느 인터뷰 내용이 와닿았다. 그가 고립된 뒤 생존에 요긴한 물품들을 주변에서 발견했는데, 그가 “우리를 도와주려고 신이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놓기라도 한 건지…”라고 한 대목이다.

나는 그걸 신이 준비해 놓은 거라고 믿는다. 목사님이 한평생 외길 목회를 완주한 것도, 낯선 땅의 선교사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복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이다. 만추에 만난 사람들 또한 내게 주신 신의 선물이라고 믿는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