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한달살이, 그리고 공감



필리어스 포그는 영국 런던 저택에서 혼자 살며 면도용 물 온도를 못 맞췄다는 이유로 고용한 사람을 해고하는 괴팍한 사람이다. 그런 포그가 클럽 회원들과 대화하다 뜻밖의 내기를 했다. 80일 이내, 1920시간, 11만5200분 안에 세계 일주를 한다는 내기다. 잡지에 연재되다 엄청난 인기를 끌며 1873년 책으로 출간된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 중 하나인 ‘80일간의 세계 일주’ 얘기다. 포그는 이 책 주인공이다.

어릴 적 필독서로 읽을 때만 해도 주인공의 예사롭지 않은 성격, 장 파스파르투라는 하인과의 조화, 일주하며 발생하는 해프닝만으로도 꽤 재미나게 읽었다. 포그가 내기에서 승리할까를 두고 읽는 내내 긴장도 했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절 그의 도전이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작가 김영하는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가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포그를 비여행·탈여행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고 말한다. 바야르가 포그와 함께 꼽은 비여행자, 탈여행자는 한 번도 자신이 사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지리학 강의를 열었던 칸트다. 김영하는 그런 비여행·탈여행의 장점을 말한다. 여행지 디테일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성장해서 포그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여행을 다녔다. 포그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선박에 앉아 배달된 음식을 먹는 그보다는 꽤 여행지를 속속들이 들여다봤다는 점이다. 최근 비여행을 탈피해 여행지 디테일에 함몰되는 여행을 했다. 트렌드로 자리한 여행지에서의 ‘한달살이’다. 장소는 필리핀 세부였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여년 만에 맞는 한 달간의 첫 긴 휴가, 안식월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했고 물가 부담이 크지 않은 세부를 선택했다. 그리고 한 달간 세부살이는 현지에서 만난 나와 같은 낯선 외국인들을 통해 여행지의 디테일에 함몰되는 일을 경험하게 했다.

몽골의 십대 청년은 지난달 세부 막탄공항에서 착륙 중 활주로를 이탈한 대한항공 여객기에 있었다. 죽음의 공포를 이야기하던 그는 느닷없이 한국 칭찬을 이어갔다. 기장의 능력이 좋았고, 승무원들은 차분히 대응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자신은 필리핀 비자를 연장할 거라고 했다. 내년 3월 수도 마닐라에서 열리는 K팝 대표 걸그룹 블랙핑크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필리핀이 한국보다 콘서트 입장료가 싸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일본의 30대 직장인은 영어를 잘하는 블랙핑크 멤버 때문에 영어를 배우러 세부에 왔다고 했다. 한국에 가서 한국어도 배울 거라고도 했다. 10살 프랑스 아이는 ‘안녕’이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아이 어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워낙 좋아한다”고 대신 설명해줬다.

외국인과 K팝, K드라마로 공감대를 형성하던 중 다른 결의 공감을 경험했다. 이태원에서 발생한 10·29 참사로 한 달 살이 기간 중 힘든 시간을 보낼 때였다. 청춘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도 애도할 방법은 없었다. 쉬고 즐기는 게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함께 슬퍼할 사람이 없다는 게 힘든 일임을 절감할 때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함께해줬다. 일본 청년은 사망자 중 일본인도 2명 있다며 한국의 아픔에 같은 마음을 전했다. 프랑스 어머니는 이태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봤다며 그런 곳이 큰 아픔의 장소가 됐다고 했다. 한국 문화로 공감하던 이들과 아픔을 공감하는 순간 10·29 참사의 아픔은 더 이상 한국 사람만의 아픔이 아니었다. 공감이 주는 힘이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공감의 힘을 말씀하셨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힘의 가치는 즐거울 때보다 슬플 때 더 크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행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그건 어디를 가느냐보다 무엇을 경험하느냐다. 세부 한달살이는 공감이 주는 힘을 경험하게 했다. 참고로 세부 한달살이는 26일 종료됐다.

서윤경 종교부 차장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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