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가 난 지 꼭 한 달이 지났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진부하고 지루한 ‘수습’이 진행되고 있다. 당국자들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변명하고, 정권은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방어하고, 어떤 이들은 대중적 분노를 정치적 반전의 동력으로 삼으려 한다. 유족들의 슬픔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보상금으로 정리되려 한다. 8년 전 사건으로부터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
한 달이나 지났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말도 솔솔 나오기 시작한다. 월드컵도 있고 경제도 어려운데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과거는 잊어버리고 미래를 생각하자고 한다. 성경 말씀에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13) 나아가자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은 잊히지 않는 법이다. 자녀를 잃은 부모는 사는 것 같지 않은 긴 삶을 견뎌야 한다. 유족들의 금속성 울부짖음이 우리 귓가에 왕왕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제대로 설명되고 제대로 치유되지 않으면 불안과 불신과 분노가 쌓일 뿐, 우리 사회는 앞으로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다. 하늘의 위로가 그들에게 내려 슬픔을 잊게 해 달라는 의례적이고 공허한 기도로는 어림도 없다.
제대로 잊기 위해서는 잊지 않아야 한다. 잊음의 역설이다. 슬픔을 억누르면 화병이 되고 기억을 억누르면 응어리진 덩어리가 화근이 되어 우리 삶을 잡아먹는다. 숨겨졌던 일들을 드러내어 그 근원을 드러냄으로써 잊음의 과정이 시작된다. 참사의 원인과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소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을 정의롭게 징계하고, 책임 있는 사람들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 온 사회가 함께 슬퍼하고 애도하며 울어야 한다. 제대로 잊는 것은 기나긴 길이다.
구약성경의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 후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큰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다. 그 뜻은 ‘잊어버림’이다. 그는 과거에 형들의 악행과 이집트에서의 노예 삶과 감옥 생활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이집트에 정착해 가문을 이루고 미래의 번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과거의 기억을 억누른다고 해서 억울한 과거가 잊히지는 않는다. 괴롭고 불편하지만 형들과의 만남과 용서라는 긴 과정을 통해, 요셉은 억압된 과거의 기억을 비로소 잊을 수 있었다. 실은 과거는 잊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사는 것이다.
성경은 잊으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저주의 시편으로 알려진 시편 137편은 예루살렘 멸망의 참상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독려의 메시지다. “아아, 우리가 어찌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잊으리. 집들이 불타고 아내와 딸들이 겁탈당하고 어린 자식이 패대기쳐져 두개골이 부서지던 그 날의 참상을 잊을 수 있을까. 원수들의 조롱과 모욕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유대인들은 잊지 않기로 유명하다. 나치 정권에 600만명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박물관을 세계 곳곳에 세웠다. 예루살렘에 ‘야드바셈’(이름을 기억한다는 의미)이라는 박물관이, 또 미국 워싱턴DC 중심가엔 홀로코스트 뮤지엄이 있다. 고문 도구, 시신을 태우는 화로, 다윗의 별이 붙어 있는 죄수복, 다 떨어진 신발 무더기, 사진과 등록증들을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았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의 말이다. “우리의 증언은 죽은 자와 또한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기억할 뿐 아니라, 그 기억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