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이상 (13) 사업 변신의 길 모색 중 ‘펄프몰드’에 눈길 사로잡혀

풍년그린텍에서 펄프몰드(pulp mold) 방식으로 제작되는 계란판 공정 모습.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1990년대 초중반 포장박스 제조업은 돈과 인맥만 있으면 누구나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소위 진입 장벽이 낮은 사업 영역이었던 셈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풍년기업사는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자본이 확실해서 포장박스의 원자재를 저렴하게 확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접대를 하거나 뒷돈을 주는 등 담당자에게 계산된 호의를 건네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우리 회사를 잘 소개해 주더라도 납품으로 연결되는 일이 별로 없어 힘이 들었다.

당연히 수익이 별로 안 나는 주문만 받기 십상이었다. 회사가 생겼다가 금세 문을 닫는 일도 잦아서 납품 대금을 떼이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수시로 부도 위기에 내몰리거나 납품업체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포장박스 사업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하나님, 포장박스 사업하는 거 너무 힘듭니다. 우리 회사 직원이 뒷거래가 있는 업체에 주문을 받는다면 저는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작은 바늘을 만들어 팔더라도 당당하게 제 물건을 팔게 해 주십시오. 제 기술로 양질의 제품을 만들어 당당하고 떳떳한 사업을 하게 해 주세요.”

답답함이 깊어질수록 기도는 더 간절해졌다. 그리고 변신의 길을 모색했다. 이는 과감한 변신, 아니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시도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을 주셨다.

고민이 깊어지던 중 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포장박람회 팩 엑스포 인터내셔널(Pack Expo International)을 방문하게 됐다. 포장재 산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팩 엑스포는 세계 3대 포장박람회 중 하나로 포괄적인 대규모 패키징 박람회로 유명하다.

첫날 혼자서 전시장 곳곳을 둘러봤다. 아이디어 넘치는 신기한 첨단 포장 기술과 포장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양한 패키징 기술과 포장재들을 구경하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폐지를 이용해 모양을 만드는 펄프몰드(pulp mold)였다. 펄프몰드로 만든 다양한 포장재들을 보고 관심이 생겨 짧은 영어를 동원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펄프몰드는 폐지를 물에 녹여 액체처럼 만든 후 금형으로 모양을 만들고 건조시켜 완성된 제품을 포장재나 완충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포장재나 완충재로 사용한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이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키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제품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펄프몰드는 사용 후 재활용, 소각 등 처리가 용이해 환경친화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한국에도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스티로폼 포장재에 대한 규제가 생기고 스티로폼을 대체하는 포장재에 대한 관심이 막 생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바로 이거다. 풍년기업사에 업그레이드 날개를 달 수 있는 열쇠다!’ 다음 날 펄프몰드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카고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경제기획원 공무원으로 유학 중인 친구에게 통역을 부탁하고 함께 전시장을 다시 찾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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