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답답한 소식과 우울한 사건이 줄을 이었다. 그나마 마무리 투수로 나선 월드컵이 이변을 쏟아내며 잠시 ‘쫄깃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한 치 양보 없이 투지를 불태우던 선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들은 ‘훈훈한’ 덤이다. 세계인의 축제라는 말이 그저 듣기 좋은 레토릭만은 아니었나 보다. 한국대표팀도 이변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축구를 하랬더니 드라마까지 썼다. 부상 투혼 월드클래스는 골로 말하는 축구에서 ‘무조건 슈팅’이 아닌 ‘잠시 멈춤’으로 뛰어난 선수 위에 위대한 선수가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뿜어낸 정교한 절제는 현란한 한방의 슈팅보다 강렬했다. 해외 전문가들도 ‘일시 정지’의 순간이 좋은 선수와 위대한 선수를 갈랐다고 폭풍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상엔 능력자가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인생에서 위대한 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둘 사이를 가르는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11명이 함께 뛰는 팀플레이 예술이 내놓은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고도의 자기 절제는 운명공동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무한신뢰에서 나오는 것임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가르쳐주었다.
끝까지 함께 ‘한 걸음 더’ 뛰어줄 것이라는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뛰어난 사람은 ‘나 홀로’ 영웅이 되지만 위대한 사람은 모두를 영웅으로 만든다.
힘은 묘한 역설을 가졌다. 절제할수록 강해지고 자랑할수록 바닥을 속히 드러낸다.
그래서였을까. 옛 어른들은 ‘못난 놈이 힘자랑하는 법’이라며 어디 가서 힘자랑 말고 먼저 제 그릇을 키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릇은 키우면 사람을 얻지만 힘자랑은 할수록 사람을 잃는다. 권력자의 힘자랑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아니 미숙한 권력자일수록 힘자랑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그릇을 키우지 못한 권력자일수록 힘자랑에 크게 의존한다. 힘에 부친 자리에 눈이 멀고 분별없는 탐욕에 취하면 타인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는 동서고금의 인류역사가 증언하는 바다.
성서도 이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증언한다. 이제 곧 맞이하게 될 아기 예수 탄생 역사에도 악명 높았던 권력자 헤롯이 등장하고 그의 힘자랑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 땅에 곧 새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동방 나그네의 말 한마디에 혼비백산했다. 그리고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는 엄청난 힘자랑을 벌였다. 겁에 질린 권력자의 파괴본능은 강자에겐 한없이 무력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잔인한 금수본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태중에 품은 채 예언자의 목소리로 ‘출애굽 어게인’을 외쳤겠는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어, 당당히 하나님의 승리 역사를 열어가게 하소서.
결국 ‘못난이’ 헤롯의 힘자랑은 자신이 두 살 아가들에게도 칼을 겨눌 만큼 형편없는 겁쟁이였음을 만천하에 실토하는 꼴이 되었다. 자기방어 기제를 갖지 못한 약자에게 검이든 법전이든 성경이든 함부로 휘두르고 위협하며 힘자랑하는 것은 가장 못되고 못난 짓이다. 아니 스스로 못난 겁쟁이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칼만 힘자랑의 도구는 아니다. 때로 법전도 성경도 칼보다 더 무서운 힘자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특히 법전과 성경은 절제와 균형을 잃으면 한순간에 공동체 전체를 망가뜨리는 무서운 무기로 돌변한다. 지구공동체는 운명공동체다. 축구와 같은 팀플레이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절체절명의 순간일수록 힘자랑이 아닌 힘의 정교한 절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조선에서 보낸 로제타 선교사가 일기장에 적어둔 글이다. “모든 생명은 만인의 생명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하희정 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