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경마와 훈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우리 한국인은 올해도 참으로 고단한 한 해를 보냈다. 그저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고 말하고 지나가기엔 너무나 힘겨웠고 동시에 힘 빠지는 세월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육적, 정신적, 영적 여유와 휴식이 절실하다.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한국인의 삶은 긴장과 피로가 극에 달했다. 이런 식의 긴장이 계속된다면 우리 삶은 결국 탄성 한계를 벗어나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 튕겨 나간 끈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유와 휴식은 어디서 올까.

이제까지 한국인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의 대표적 패턴은 ‘질주’다. 이런 삶은 출발선부터 잔뜩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다가 출발 신호가 내려짐과 동시에 달음질치기 시작해 결승점까지 내달리는 경주마와 그 위에 올라탄 기수를 연상시킨다. 기수는 조금이라도 더 앞서려고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을 가한다. 경마는 고도의 기술과 희생을 요구하는 경기이지만 인간의 삶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하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경마처럼 자기 삶을 대하는 이가 많다. 자기 삶 위에 올라타 자기 삶에 채찍질을 가하는데, 채찍질하는 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아닌가.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이 판을 치는 한국 사회이다 보니 질주형 인생이 많다. 더구나 우리 사회가 격동의 근현대사를 겪어 오면서 매사에 극단적인 자세가 몸에 배었다. 우리는 간혹 중도탈락자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런 눈길을 오래 보낼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다.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내딛는 것 같은 삶이 이어지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식의 막가파 인생관이 판을 치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씨가 먹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경마 대신 훈수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훈수는 흔히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옆에서 넌지시 한 수 거드는 것 즉 충고를 가리킨다. 그런데 훈수가 절묘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훈수 두는 사람이 반드시 고수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훈수가 가능한 것은 그의 실력보다 현장에 있으면서도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판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훈수의 지혜는 상황에 매몰되는 대신 상황을 객관화하고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서 나온다.

한국인에게 자기 삶 위에 올라타 자기 삶에 채찍질을 가하는 대신, 자기 삶 위에서 자기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와 휴식이 필요하다. 질주형 인생은 자기 삶을 수용하거나 위로하기 어렵다. 질주형 인생은 자기 삶보다 결승점에 시선이 머물고, 자기 삶을 그저 자신을 결승점에 데려다줄 도구로 본다. 그런데 그런 고단한 삶이 바로 자기 것이고 자기가 아닌가.

세계교회협의회는 20세기 말의 신학적 주제들을 망라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 신학을 주창했다. 특히 ‘창조질서의 보전’이란 주제는 우리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최근 신학은 환경에서 생태로, 다시 생태에서 생명으로 생명에 대한 논의를 확대하고 있다. 십계명도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천명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 10위권에 들어선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줄곧 유지하는데, 막상 1위가 되기 시작한 것이 잘살게 되면서부터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잘’ 산다는 게 뭘까? 잘살아야 한다고 내몰리고 잘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한국인들이 참 안쓰럽다. 견디기 힘든 긴장과 피로로 지친 삶, 끊임없는 위기와 재난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가 일상이 돼버린 가운데 살아남은 한국인이여, 자기 삶에 채찍 대신 따듯한 손길을 보내자. 우리 모두 올해도 참 수고 많았다. 부디 연말연시라도 여유와 휴식의 시간이 되기를.

안교성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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