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월드컵의 열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원정 16강을 향해서 뛰고 넘어지고 날고 구르던 선수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오랜만에 승패가 아니라 스포츠 자체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봤다. 축구가 처음 생겨났을 때는 상류계급의 스포츠였다.
노동자는 축구할 시간이나 여유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의 여건이 나아지면서 노동자도 축구를 할 수 있었고, 모든 불평등과 불합리한 구조를 벗어난 그라운드의 새로운 질서와 동그란 볼은 현실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축구는, 공이 둥근 것처럼 세상 이치가 그렇듯 둥글게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게 했으며, 공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 가능한 축구처럼 사람 사는 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축구에 정치·경제적 의미가 입혀졌고, 그라운드를 달리던 노동자들의 희망은 수백억원대의 몸값을 자랑하는 축구선수에게로 전이되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동네축구의 유쾌함이 살아있고, 월드컵도 몸값 높은 선수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이제 그라운드의 신화와 일상의 기적을 연결하는 모두의 축제가 되었다.
축제는 우리에게 잊고 있던 열정과 볼 수 없던 희망을 준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아르헨티나의 골잡이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는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국가 부도를 선언할 정도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바티스투타는 조국 아르헨티나에 값진 승리를 안겨주었다. 물론 그것으로 아르헨티나의 부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보았고 열광했다. 2002년 붉은 악마가 외쳤던 ‘꿈은 이루어진다’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설레게 한다.
2022년에는 태극기에 쓰인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글귀가 마음을 울렸다. 그것을 누가 처음에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글귀는 달리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선수들의 마음과 그들을 응원했던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으며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힘든 일상과 자꾸 늘어지는 마음이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월드컵이 끝나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그렇게 조금 더 뛰고 그렇게 조금 더 아픔을 참는다면 우리의 일상에도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월드컵이 지구촌의 12월을 온통 덮고 있지만 그래도 12월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며 기억하는 때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지금, 더불어 기억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꺾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이 땅에 그의 아들을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원치 않고 사람의 모양을 취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마음을 꺾지 않은 예수님의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생각나게 한다. 그저 그런 우리의 일상과 우리라는 존재를 기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꺾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유쾌한 휴식이었던 축구가 거대한 자본주의 산물이 된 것처럼, 예수님이 오신 날도 마구간의 비천함을 털어내고 크고 화려한 불빛을 자랑하는 거대한 축제가 되었다. 처음과 달리 화려하고 거대해지면 그 원래의 의미도 무뎌질 수 있다. 무엇을 기뻐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기억하는지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열정도 희망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재미있는 축제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닐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인간의 온갖 불순종에도 꺾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구원 의지, 인간의 온갖 배반에도 꺾이지 않았던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때다. 반짝거리는 트리의 불빛이 꺼지면, 꺾일 마음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닮은, 꺾이지 않는 그 마음을 회복할 때다.
김호경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