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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한겨울 밤의 꿈, 예술 정책



끝날 듯 끝날 듯하던 코로나19 국면이 이제 삼년이 다 돼간다. 그사이 대면을 전제로 하는 예술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치명타를 입었다. 시장의 논리가 전통적인 예술을 소멸시킬 것이라는 위기의 경고등은 지난 세기 중반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 시장마저 점진적인 퇴조의 운명에 봉착했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첫 번째 묵시록이다.

우리가 예술의 존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 가지 지점에서의 논의는 불가피하다. 제일 먼저 예술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인류사회에서 예술이 선택재로 합의된다면(가령, 예술? 그건 니들이 좋아서 하는 거잖아? 예술이 밥 먹여주나? 하는 시각이 득세한다면) 방탄소년단과 달리 자체 생존 능력을 지니지 못한 예술 혹은 예술가들은 이제 단숨에 고사될 것이고, 예술은 여가 선용이라는 취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이 첫 번째 지점의 합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술이 아무리 지극히 개인적인 자발성의 결과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류 문명의 중요한 기반이며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라는 인식에 도달할 때 그 공공성은 가치 있게 수호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화두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공공적 가치를 예술과 예술가들 또한 전력을 다해 소명해야 한다. 나는 예술가니까 지원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세상에 없다. 자신의 예술 행위가 왜, 어떻게 공공성을 지니는지를 현실적으로 증명할 의무가 있다. 하나의 예술이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수용자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어떤 변화를 생성시키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확장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산업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예술의 수용자들은 익명화된 소비자로 전락해 왔다. 성공한 예술가는 시장의 권력이 됐다. 그러나 이제 세상의 룰은 바뀔 것이다. 예술 생산자와 예술 수용자가 상호주체성을 지닌 동등한 존재로서의 세계로 우리는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할 때 예술은 인류 모두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퉈야 할 세 번째 전선은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 정책의 출현을 두고 벌이는 논쟁에서 형성될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고든다면 기존의 반복적인 예술 창작지원 정책을 뛰어넘는, 가장 공격적인 복지로서의 획기적인 예술가 인프라 조성 정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일상이 예술이 되는 예술국가, 예술도시 정책이 필요하다.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 모두를 성숙한 예술시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개발도상국 시절일 때 모든 시민은 산업의 역군이었다. 그리고 선진국 문턱에 발돋움할 때 한국은 민주시민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했다.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는 국가의 일원으로 성장한 지금 예술시민이라는 보다 더 진화한 시민 모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굳이 백범 김구의 꿈을 여기서 상기하지 않더라도 예술가들을 국가와 공동체가 육성하고 책임지는 사회야말로 빛나는 문화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학력과 재산, 연령 및 지위와 관계없이 어느 누구라도 원한다면 예술 교육과 향유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의 구축은 위대한 문화국가를 향한 충분조건이다.

많은 이에겐 이 같은 명제가 황당한 한겨울 밤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매일 목도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약탈과 착취의 혼돈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는 더욱 소중하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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