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5년 전인 2007년 12월 중순. 충남 태안 앞바다는 해안선을 따라 검은 기름띠로 뒤덮였다. 온갖 어패류가 폐사했고, 어민들의 피해는 막대했다. 유조선과 예인선이 충돌하면서 원유 1만2547㎘(200ℓ들이 드럼통 6만2700개 규모)가 유출된 사고 탓이었다.
역대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가 터진 지 1주일 만에 교계 차원에서는 ‘서해안 살리기 자원봉사단’이 꾸려졌다. 한 달 뒤엔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이 공식 발족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장 자원봉사자들과 지원 물품 등이 급속도로 줄어들자 ‘우리 교회들이 힘을 한번 모아보자’고 나선 것이다.
그 뒤로 끝 모를 자원봉사 행렬이 이어졌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형편에 맞게 사고 현장을 찾아 기름 묻은 돌멩이와 모래를 닦아냈다. 한교봉에 따르면 사고 이후 현장에 달려갔던 전국의 자원봉사자 123만명(연인원) 가운데 약 80만명이 성도들이었다. 교계 안팎에서는 지금도 “한국 교회사에서 3·1운동 이후 가장 대단했던 사역”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고 발생 10년이 지난 2017년 9월에는 기름 유출 사고 극복 과정을 담은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이 태안 현지에 문을 열었다. 기름 유출 사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사고 이후 방제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태계가 회복됐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난달 말,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들을 포함해 기름 유출 사고 극복 과정이 담긴 ‘태안 유류 피해 극복 기록물’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아태 지역 목록’에 등재됐다. 지난 20일에는 충남도청에서 ‘태안 유류 피해 극복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인증서 수여식이 열렸다. 인증서를 받은 기관은 한교봉을 비롯해 14곳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태흠 충남지사는 “태안 유류 피해 극복은 재난 극복의 신화적 사례다. 123만 대규모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바다 생태계를 살려내고 위기를 기회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나간 사건이다. 기록을 보존하고 등재된 덕에 상처와 치유를 기억하고 교훈과 희망을 되새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 지사의 말 속엔 기회 치유 희망 같은, 봉사가 주는 유익이 모두 담겨 있었다.
27년째 태안에 거주하는 유성상(만리포교회) 목사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유류 피해 사고 직후 봉사활동에 나섰고, 기념관 설립 뒤에는 해설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며칠 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유네스코 등재 소식 이후 기념관 방문객이 20% 정도 더 늘어난 것 같다”면서 “더 많은 분이 한국교회의 유산을 통해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앞서 2014년 본보 취재팀은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7년쯤 지난 시점에서 태안의 교회들을 집중 취재한 적이 있다. 유류 피해 사고 당시 지역 거점교회가 돼 자원봉사자들을 챙기고 섬겼던 교회들이다. 이른바 ‘디아코니아(Diaconia·섬김과 봉사)’에 앞장섰던 현지 교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성도가 늘었고, 주민들과 가까워졌으며,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만리포 토박이였던 한 70대 할머니는 “‘교회가 우리 마을을 이렇게 열심히 돕고 있구나’ 감명을 받아 다시 나오게 됐다”며 당시 본보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디아코니아가 자연스레 전도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섬김과 봉사 자체가 무조건 최고가 될 순 없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한 디아코니아다. 거저 주는 마음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같은 것들 아닐까. 올해 성탄을 보낸 뒤 세밑에는 태안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다. 세계 유산으로 기록된 유류피해극복기념관에 들렀다가 바닷가 옆 천리포수목원도 거닐 만하다. 그리고 깨끗해진 만리포 해변에서 겨울 바다 너머 저무는 해를 감상하는 것도 뜻깊은 추억이 될 것 같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